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918m: 소유형의 인간(눅 12:15-21)

2011년 9월 18일 주일낮예배
본문: 눅 12:15-21
제목: 소유형의 인간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유대인 출신인 에리히 프롬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헤겔좌파를 뜻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사회철학자이자, 심리학으로는 신프로이트 학파의 거장입니다. 그가 쓴 <하벤 오더 레벤(Haben oder Leben)>, 즉 <소유냐 삶이냐> 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인간 유형이 나옵니다. 우선 소유형의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은 오직 소유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소유가 자기 삶의 목표요 목적인 사람입니다. 소유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인간입니다. 반대로 존재형의 인간은 삶의 의미,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두 유형 중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소유형입니까? 존재형입니까? 

주님이 제자들에게 소유냐, 존재냐를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 주제가 바로 소유냐, 존재냐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외경인 도마복음 63장에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많은 토지를 가진 한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마음속으로 내가 저 밭에 씨를 뿌리고 잘 가꿔 추수해서 내 곳간마다 가득 채워 부족함이 없게 하리라.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죽고 말았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보다 훨씬 간결하지만 주제는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봅니다. 한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해 농사가 풍년이었습니다. 그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곡식을 쌓아 둘 곳간이 부족했던 겁니다. 당장 사용하던 곳간을 헐고 증축을 했습니다. 거기에 곡식을 잔뜩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흐뭇해서 독백을 합니다. ‘내 영혼아 이제 편안히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자.’ 근데 달콤한 환상에 젖어 있는 부자에게 날벼락처럼 하나님이 죽음을 선고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얼마나 황당하고 허무합니까? 

하나님이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명명합니다. 부자여, 출세한 자여, 성공한 자여라고 부르시지 않고 어리석은 자로 부릅니다. 이 부자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이 맞습니까? 여러분은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동의하기가 거북합니다. 우리의 롤 모델인데 왜 어리석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한 발 앞서 성취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왜 밤낮 없이 뛰고, 물불 가리지 않고 온 몸을 던집니까? 이 사람처럼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꿈을 이룬 사람인데도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왜 이 부자가 어리석습니까?

우선 그는 전형적인 소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곳간을 넓히고 거기에 많은 재물을 쌓아두는 데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낀 사람입니다. 소유가 자기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인 사람입니다. 소유가 자기의 삶과 행복을 마냥 보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사람의 기대대로 소유가 행복을 보장했습니까? 곳간을 넓히면서까지 잔뜩 쌓아놓은 부가 그의 미래와 행복을 보장했습니까? 그의 바람을 그의 소유가 이루어주었습니까? 부자가 그의 바람이 얼마나 허망한 착각인지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오늘 너의 영혼을 도로 찾는다고 하십니다. 소유형 인간의 정곡을 찌르고 계십니다. 그의 재물이 당장 오늘 밤에 죽어야 할 그의 운명에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소유가 절대 우리 삶에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보다 극명하게 가르쳐 준 말씀은 없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도 곳간을 넓히고 거기에 하나라도 더 쌓지 못해서 안달입니까? 모두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잔뜩 쌓아두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게 인생의 절대적인 목표인데, 그러나 누구 마음대로 입니까? 지금도 사람들은 소유만 넉넉하면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행복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소유가 지상목표인 겁니다.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오직 고기만 낚고 있습니다. 물론 고기를 낚을 수도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고기를 낚는 것은 사람을 낚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우리는 잃어버렸고, 우리는 변질되었고, 가치관이 전도된 것입니다. 너도 나도 소유 밖에 모릅니다. 완전히 물질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곳간을 헐고 조금이라도 곡식을 더 쌓겠다는 소유형의 인간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더 늦기 전에 가치관을 바꾸십시오. 더 늦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를 재고하십시오. 본문 21절 말씀처럼 자신에 대해 재물을 쌓기보다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사람이 존재형의 인간입니다.

다음으로 이 부자가 어리석었다는 것은 자기 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의 화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등장인물이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모노드라마입니다. 부자만 나옵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아내도 자식도 없습니다. 내 곡식, 내 곳간, 내 물건, 내 영혼, 내 평안함, 내 즐거움만 있습니다. 헬라어 원서로 이 대목을 보면 길지도 않은 본문에 <나>라는 말이 14번이나 나옵니다. 대화는 없고 끝까지 독백입니다. 그는 오직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리석다는 겁니다. 물론 부자가 남의 것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서 부를 축적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잘못되었다고 하며, 어리석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게 비록 정당한 부라 할지라도 절대 나 혼자 쓸 권리는 없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하게 벌었다 하더라도 자기만 즐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실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도로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내 자식도, 내 심장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회수하겠다는 뜻입니다. 순수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혼이 내 것이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것이기에 오늘 밤에 다시 회수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회수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꼼짝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착각에 빠져 삽니다. 내 삶, 내 가족, 내 영혼, 내 행복만을 찾습니다. 소유가 내 수고와 땀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내 것이라 생각하기에 무엇을 좀 가지면 기고만장하며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겁니다. 다 하나님의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면 내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하나 내 뜻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나는 매니저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의식만 있지 청지기 의식이 없습니다. 이게 착각이요 교만이며 어리석다는 겁니다. 부디 말씀을 통해 깨달으십시다. 아직도 우리는 소유형의 인간이지 존재형의 인간이 못 된다는 사실을 겸허히 고백하고 회개합시다. 

이 부자가 어리석었다는 것은 영혼의 진정한 필요를 몰랐던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이게 말 그대로 될 수 있습니까? 무지함입니다. 오히려 돈 많고 재산이 많은 사람일수록 영적으로는 피폐해질 수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수록, 사회보장제도를 많이 누리는 나라일수록 자살 지수가 높습니다. 우리도 못 살 때는 이렇게 자살지수가 높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6년 연속 세계 부동의 1위입니다. 지금도 30분에 한 사람씩, 하루에 45명씩 자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살지수가 천정부지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곳간에 쌓아 놓은 많은 소유가 절대 우리 영혼에 궁극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경제지수와 자살지수는 항상 정비례합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초대교회 중 가장 부자 교회였습니다. ‘네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네 가난한 것과 곤고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가난하고 더 곤고하고 더 눈멀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영혼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부자처럼 곳간에 쌓아둔 소유로 여러분의 영혼의 필요를 대신하고 있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영혼이 말씀이 없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행복해지며 만족해합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즐거워하고 평안히 쉴 수 있는 참 비결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 소유형이 아니라 존재형의 인생으로 복된 인생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SSM1gR7vY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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