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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div>2011년 9월 4일 주일낮예배</div>

<!-- paragraph:p0002 -->
<div>본문: 요 5:1-9</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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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포기하지 말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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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 paragraph:p0005 -->
<div>[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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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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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주님이 양문 곁에 있던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38년 된 환자를 고친 사건입니다. 그는 중풍병자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엔 환자가 많았습니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따금씩 천사가 거기에 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거기에 나타나셔서 38년 된 병자를 보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시자 병이 나았다는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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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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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그런데 주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많은 병자를 뚫고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 병자가 거기에 모인 환자들의 대표라서 그를 찾으신 것일까요? 그가 제일 딱한 처지여서 그를 주님이 찾아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그가 38년이나 된 병자이지만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과의 경쟁력이 제로 수준이었으나 절대 생의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현실은 그가 병이 낫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거기에서 물이 동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주님이 그를 자의로 찾아 가셨다기 보다는 그 환자가 집요하게 주님을 불러서 호출당해서 가신 것입니다. 믿음의 기 싸움은 항상 그렇습니다.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이 내게 백기를 드십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과의 기 싸움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결국 주님이 항복하십니다. 여전히 낫고자 하느냐? 네 낫고자 합니다. 당장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이것으로 상황이 끝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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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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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그러나 내가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체념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요. 그 순간까지 아픔을 겪은 만큼 불행으로 끝나는 겁니다. 본문의 환자를 보면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는데 다른 사람들과 입수 경쟁을 벌여야 합니다. 경쟁력이 제로인 상태인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주님을 그 현장까지 호출한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 아시지요? 그녀는 주님을 따르며 비명같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을 돌아보옵소서.’ 주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발걸음을 멈춰 그녀를 부르셔서,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해 개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 같은 이방인에게 줄 떡은 없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심한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가나안 여인이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고 울며 체념하고 돌아갔습니까? 그녀는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지 않습니까?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이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라!’ 그 시로 딸이 나았습니다. 주님의 모욕을 듣고 가나안 여인이 체념하고 돌아갔다면 딸이 나을 일은 없었습니다. 상처받은 만큼 불행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럼에도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붙들고 늘어졌더니 주님이 당장에 ‘딸아 너야말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다.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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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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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투항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아시지요? 주님이 맹물을 양질의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 말입니다. 주방 쪽에서 나온 마리아가 주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로서는 이 문제를 주님 만큼은 풀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뜻 밖에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여자여는 원어로 ‘구나이’인데 이 말이 모욕적인 말은 아니나 어머니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는 매정합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심각한 표현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마리아가 체념했습니까? 마리아는 옆에 있던 시종들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언가 하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이렇습니다. 주님은 전혀 기적을 행하시고 싶지 않았는데, 즉 공생애 플랜으로 보면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는데도 마리아가 체념하지 않았기에 본의 아니게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믿음과 신뢰에 주님이 항복하신 사건이 가나의 혼인집에서 베푸신 주님의 공생애 첫 기적입니다. 주님이 아무리 모욕적이고 냉담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거절하셔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주님이 져주십니다. 자식에게 이길 부모 없듯이 그렇게 주님이 항복하십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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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 paragraph:p0015 -->
<div>야곱을 보십시오. 얍복나루터에서 밤새도록 하나님을 잡고 씨름했습니다. 동이 터오고 해가 뜨려고 하는데도 하나님의 바지가랭이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허벅지뼈가 어긋난 겁니다. 허벅지뼈는 골반과 고관절을 형성합니다. 허벅지뼈가 어긋났다는 것은 고관절이 어긋났다는 겁니다. 고관절이 어긋남에도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절대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그때 하나님이 내가 졌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네가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국호까지 된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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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 paragraph:p0017 -->
<div>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는 얘기입니다. 정말 그 사건 만큼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얘기는 다시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아비인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엽기적인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아무런 저항이 없습니다. 자기 심장보다 더 소중한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정말 하나님께 잡아 바치겠다고 칼을 목에 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해석이 안 되었습니다. 저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완전히 포기하고 체념했거나, 아니면 너무 큰 충격에 실성해서 정신줄을 놨거나 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체념하거나 실성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희망을 가지고 자기 아들을 잡았다는 겁니다. 무슨 희망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내 아들을 살려주실 것이다는 희망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되십니까? 독자를 잡아 바치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 아들을 잡아도 하나님은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죽어도 능히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제 아들의 목을 제 손으로 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급해지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진정해라. 내가 양을 준비했다.’ 이게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오고오는 세대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마.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아브라함의 후예들입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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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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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여러분, 지금 우리 사정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어찌 100세에 얻은 외동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야 했던 아브라함만 하겠습니까? 부디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며 포기하지 마시고, 38년 된 환자를 생각하시며 체념하시며, 마리아를 생각하시며 확신을 가지시고, 야곱처럼 물러서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모욕을 당해도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맞장구를 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모든 위기와 시험이 복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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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 paragraph:p0021 -->
<div>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UvoXnjLP18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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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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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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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paragraph:p0025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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