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절구와 공이(잠 27:20-27)

절구와 공이
잠27:20-27
2011.9.3

<절구와 공이>란 곡식을 찧어 가루로 만드는 도구를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흔히 사용해 온 농경사회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절구는 보통 돌이나 나무 혹은 금속으로, 공이도 나무나 금속 재질로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절구에 넣고 빻기도 했습니다(민11:8). 그런데 현자는 여기서 이 절구와 공이를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22절).

자족하라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20절).
그렇습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스올(무덤)은 결코 죽음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유사 이래 한 번도 <이제 그만!>하고 죽음을 저지 시킨 적이 없습니다. 아바돈(지옥)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만원이니 그만 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여전히 그 탐욕스런 입을 벌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사람의 눈도 그렇습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많고 더 크고 더 강한 자극을 바라며 오로지 쾌락과 세상적인 욕망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게걸스러운 탐욕을 마냥 보고만 계시지는 않습니다. 결국은 응징하십니다. 마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듯이 거칠고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칭찬하라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 하느니라>(21절).
물론 남이 칭찬할 때 도리어 우쭐거리며 교만해지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헤롯은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행12:22)며 아부하자 교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다 주의 사자의 응징으로 즉각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행12:23)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칭찬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훌륭한 인격으로 단련시킨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은을 연단하는 도가니나 금을 연단하는 풀무불처럼 뜨겁고 혹독하게 다뤄야만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습니까? 칭찬에 인생하지 마십시오. 칭찬에 보다 넉넉하십시오. 때로는 칭찬과 격려가 도가니나 풀무불보다 더욱 효과적인 연단법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채찍만이 능사는 아니며 당근도 필수불가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칭찬에 인색하고 오로지 도가니와 풀무불만을 고집할 때 절구와 공이를 동원하사 거칠고 혹독한 연단만이 전부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하시고 칭찬의 소중함을 깊이 체득하게 하십니다.

부지런하라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23).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26-27). 
이는 특히 자신의 직업, 자신의 사명과 소명에 충실하고 게으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자신의 일이나 과제에 대해 기계적으로, 의무감만으로 임할게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살피라><마음에 두라>는 말씀은 소명감을 가지라, 천직의식을 가지라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모든 노동, 근로, 직업은 다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거리나 공원을 쓰는 환경미화원도 고되고 힘들고 천한 직업이요 노역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지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노동자체가 곧 소명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보전을 위한 구원사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늘 짜증과 불만과 불평으로 일하며 오직 대가와 봉급만을 바라고 마지못해 하는 노동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절구와 공이의 개입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노동과 근로가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축복과 주님의 소명이 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