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8] 다말의 모험 (마 1:1-6)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몹시 추운 대강절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비록 두 세 사람일지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고 하신 말씀대로 오늘도 조촐한 저희 가정의 이 온라인 예배에 함께 하사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시간이 되게해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 다음 주일이 성탄절입니다.
저희들 더욱 자신을 살피며 비우며 내려놓게 하사 올해도 가난한 자 그리고 겸손한 자를 찾아 새롭게 성탄하실 주님을 뵙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환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 아픔을 싸매주시고, 마음 상한 자들을 위로하사 다 치유와 새로워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올 성탄절에는 저희 모두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시옵소서.
여전히 온라인 예배조차도 쉽지 않은 가정들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일을 지킬 수 있는 믿음과 확신을 주시고, 여의치 않은 환경과 각자가 처한 사정도 속히 원만케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깨달음을 주사 저희 가족 모두 주님의 따뜻한 육성을 들으며 자신을 성찰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218
마 1:1-6
다말의 모험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사람들은 흔히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유대교와 우리 기독교의 경전이니까 신구약 성경에는 오직 성스럽고 은혜로운 말씀과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놀랍게도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는 그렇지가 않죠. 성경에는 꼭 거룩한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고 인간 사이에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 추악한 사건들이 다 나오고 별의별 모순과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성경이 그러한 진부한 이야기나 사건들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축소하려거나 감추려거나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노력을 일체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진실을 실체적 진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계보, 주님의 족보인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훌륭하시니까 당연히 주님의 조상들도 다 훌륭하고 대단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별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의 족보의 특이점 하나가 뭡니까? 유대 족보에는 결코 올라갈 수 없었던 여성들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등장한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오는 여성들 모두 몇 명이죠?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렇게 모두 다섯 명이나 됩니다. 파격입니다. 너무도 이례적입니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족보에 그 이름을 못 올렸잖아요. 유대 사회도 전통적으로 아주 완고한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에 심지어 여성들은 사람의 수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중동 이슬람 국가들은 거의 여성들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잖아요. 옛날 유대 사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계보에 이렇게 여러 명의 여성들이 그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당시 문화나 사회적 통념으로 볼 때 아주 특별한,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데,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다 조신하거나 품행이 방정한 현모양처들이었다기보다는 이방 여인이거나 다 삶의 이력이 그리 모범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성녀가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창녀였잖아요. 또 룻은 이방 여인이었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불륜녀였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여인들이 다 주님의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주님의 조상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맨 먼저 나오는 이 다말이라는 여인의 얘기는 사실 말도 안 되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본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당연히 유다와 다말이 부부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가 아니라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인 고부 관계입니다.
세상에 이런 망측한 일, 이런 패륜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시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인 다말과 관계해서 그것도 쌍둥이 형제인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그 베레스의 계보에서 후에 주님이 탄생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원래 유다는 엘, 오난, 셀라, 이렇게 세 아들을 뒀습니다. 그런데 장남 엘이 다말과 결혼해서 미처 자식도 못 보고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혼례법에 의하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다시 그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대를 잇게 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시형제 혼례법이라는 겁니다. 당시 근동지방에는, 사실 어느 나라나 다 이런 관습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다도 첫째인 엘이 죽자 다시 둘째인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인 다말과 결혼하게 합니다. 그러나 정작 오난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비록 전통과 율법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형수와 결혼은 하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이면 자기 아들이지 그 아이가 왜 형의 아들이 돼야 하느냐는 겁니다. 분명 내가 낳은 내 자식인데 왜 자기 아들이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삼촌이라고 불러야 되느냐는 겁니다.
따라서 그는 아예 그런 불행한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8장 9절을 보면, 오난이 형수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자신의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에 사정했다고 했고, 또 하나님은 그런 오난을 징계하사 그 역시도 요절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다말은 두 번째 남편마저도 그렇게 허무하게 잃고 졸지에 이 세상에서 가장 박복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시아버지인 유다도 그렇습니다.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와 대를 이어줄 손주는커녕 아들만 둘이나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겁니다. 또 그러다가 자칫 막내까지도 장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가문에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서 어떻게든 다말을 그냥 친정으로 돌려보내야겠다고 작정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8장 11절을 보면,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 집에 가서 수절하고 막내인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유다가 셀라도 그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함이라”
“보다시피 막내는 아직 미성년자니까 저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몇 년 친정에 가있어라.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다시 부르마.”
다말은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아버님, 저 그냥 아버님 곁에서 살면 안 될까요? 시집을 온 이상 여기가 제 집이잖아요. 제발 이 집에서 절 쫓아내지 말아주세요. 저는 이 집 며느리예요. 부디 이 집 가문의 씨를 받아 대를 잇게 해주세요. 아버지 제발 절 이 집에서 계속 살게 해주세요.”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복걸 해보았지만 시아버지 유다는 강경했습니다.
“너는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막내가 성인이 되면 내가 다시 너를 부르겠다고 하지 않느냐. 당장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다말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친정으로 돌아간 다말이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 유다가 다시 그를 불러주지 않은 겁니다. 그 사이에 시아버지인 유다도 자기 아내를 잃고 그래서 홀아비가 됐고 막내 아들인 셀라도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해야 되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말이 결정적인 소식 하나를, 결정적인 정보 하나를 입수합니다. 시아버지인 유다가 양털 깎는 일로 지금 자기가 사는 친정에서 아주 가까운 딤나까지 온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다말에게 아주 기발하고도 도발적인 계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그것은 너무도 극적이고 위험해서 모험이 아니라 목숨을 건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것인데, 그럼에도 다말은 그 기상천외한 계략을 즉각 실행에 옮깁니다.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진하게 하고, 지금까지 입고 있던 과부 복장을 벗어 던지고 화려하고도 야한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성문에 나가서 요염한 자태로 시아버지 유다가 그곳을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만에 드디어 시아버지인 유다가 그 성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다말을 창녀로 알고 다가와 수작을 거는데, 이 대목을 창세기 38장 15절 이하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내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다말이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내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의 전략은 아주 치밀했고 또 적중했습니다. 화대로 내일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받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잡은 다음에 시아버지와 관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튿날 유다가 사람을 보내 새끼 염소를 갖다 주고 담보물로 맡긴 그 인감도장과 지팡이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다말은 이미 그 성문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습니다. 모든 게 용의주도한 다말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습니다.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거죠. 유다가 사람을 보내 며느리의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는 노발대발하면서 당장 그 간음한 며느리를 끌고 와 율법에 따라 화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드디어 다말이 시아버지 앞에 끌려와 신문을 당하는데, 뭐라고 진술했습니까? 과부가 수절하지 않고 임신을 한 건 사실이니 그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다만 저는 바로 이 물건의 주인과 관계하여 아이를 가졌으니, 이 도장과 지팡이의 주인을 좀 찾아달라며 시아버지 유다의 인감도장과 지팡이를 증거로 내놓습니다.
순간 유다가 경악을 하며 그 자리에서 완전히 두 손을 들지 않습니까, 그래 네가 옳았다. 내가 막내 아들 셀라를 주지 않자 네가 이렇게 해서라도 이 가문의 후사를 얻으려 했구나. 그러면서 며느리 다말의 그 극단적인 모험과 도박에 승복하지 않습니까? 내가 잘못하고 네가 옳았다. 나를 용서해다오.
사실 이 사건을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윤리적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막장 드라마고, 패륜의 극치 아닙니까? 그럼에도 이런 여인이 엄연히 주님의 조상으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재가 되고 또 그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패륜의 아들 베레스가 유다 지파의 가게를 잇는 메시아 계보의 한 주자가 됩니다. 그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베레스가 다윗의 10대조 아닙니까?
자, 이런 역사적 사실을 오늘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으냐 하는 겁니다. 우선 다말이 이렇게까지 모험하며 도박하며 패륜을 불사하며 유다 지파, 유다 가계를 고집한 이유가 뭐였을까요?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유다의 가계를 통해 계승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랬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가계에 남기를 원했고, 또 자기가 바로 그 계보의 주자를 출산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유다가 성인이 되면 막내 셀라를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아예 그 시아버지를 직접 공략해서 씨를 받고 또 임신까지 한 겁니다. 당시 다말로서는 후사도 없고 또 유다 가문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그것은 마치 시할아버지인 야곱의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야곱도 그랬잖아요. 원래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승계할 수 있는 주자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초유의 반칙을 범합니다. 형을 등치고 아버지를 기만해서 결국은 형의 그 장자권을 훔치잖아요. 말도 안 되는 패륜을 범한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잖아요. 왜요? 구원의 계보에 서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승계하는 일이라면, 그게 비록 율법을 범하고 인륜과 천륜을 범하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험과 도박을 마다하지 않고 기어이 결행한 야곱의 믿음을 높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다말도 그렇습니다. 다말도 마찬가집니다. 그게 비록 윤리와 도덕이나 개명을 범하는 일이고, 자칫 화형을 당할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지만, 축복의 계보, 구원의 가계에 남을 수만 있다면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한 다말의 믿음에 결국 하나님도 승복하신 겁니다.
다말에게는 바로 그런 모험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극단적인 믿음, 비상한 막장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말의 그 모험, 다말의 그 도박은 결코 시아버지 유다에 대한 인간적인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정말 시조부인 야곱 못지않은 치명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녀의 그 부도덕이나 불륜, 패륜보다는 저주와 죽음마저도 불사하며 덤빈 가공할 믿음에 더 많은 점수를 주셔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자가 주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게 하시고, 또 그녀로 하여금 주님의 복된 조상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얘기나 오늘의 주인공인 야곱의 손주 며느리인 이 다말의 얘기는 다 충분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다말의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뭘까요?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서고, 메시아의 계보에 우리의 이름을 등재하는 일이야말로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의 선이고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그게 불륜이 아니라 패륜이고, 인륜이 아니라 천륜을 범하는 한이 있어도 도박을 해서라도 무조건 쟁취하는 게 옳다는 겁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어이 내 것으로 삼는 게 맞다는 거예요. 그건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불륜의 자식을 낳는 한이 있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절대적인 선택이고 결단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다 말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구원의 가게에 환장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모험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 거룩한 성탄의 계절에 여성으로서 최초로 메시아의 계보에 그 이름을 올린 다말이라는 여인의 믿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숨을 걸고 도박한 다말의 그 비상한 선택과 결단을 한 번 깊이 사색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같은 성녀뿐 아니라, 이 다말과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같이 전혀 거룩하지 못한 여인들도 오직 믿음 하나로 다 주님의 계보에 그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에 감사하시며 주님의 성탄을 더욱 고대하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 이미지: 원래 주소 열기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