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1] 말씀과 성탄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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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오늘은 대강절 셋째주일이자 성서주일입니다.
저희 식구들 주님 오심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함께 말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된 시간이 되도록 성령으로 함께 해주시옵소서.
한 해의 마지막인 이 12월도 벌써 중순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저희들 오늘도 주님의 음성과 함께 삶에 지친 이웃들의 한숨도 함께 듣게 하사 그들을 위해 서도 기도하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환자들을 찾아가사 안수해 주시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온라인 예배조차 힘든 가정들을 기억하사 언제 어디서나 주일을 지킬 수 있는 믿음과 여건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 푸른교회가 이제 새해부터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저희 가정을 이끄사 주님 보시기에 가장 복되고 이름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211 요 1:14 말씀과 성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이자 성서주일입니다. 성서주일은 매년 12월 둘째 주일에 전 세계가 함께 지키는 기념주일이죠.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말씀과 성탄, 말씀과 주님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탄이 뭐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라고 그랬죠. 이 대목을 헬라어 원문에서 보면, 문장 맨 앞에 ‘카이’라는 접속사가 있고 이어서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 그렇게 돼 있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고 사르크스는 육신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대체 무슨 뜻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다. 흔히 우리는 이걸 성육신이라고 하죠. 성육신이라는 말의 성은 한자로 거룩할 성이 아니고 이룰 성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이란 육신을 이루다, 육화되다, 화육이 이루어지다, 그런 뜻입니다. 영어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라틴말을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라틴어로 카네이션(carnation)은 육체라는 뜻이고 그 앞에 인(in)이 붙으면 육화, 성화, 화육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성육신을 영어나 라틴말로는 인카네이션이라고 하고 또 독일말도 같습니다. 인카나치온(Inkarnation)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야 그게 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성경에 있는 것이니까,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그대로 믿습니다마는 처음 이 요한복음의 수신자들 당초 이 요한복음이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헬라인들, 헬라 문화권 사람들은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레니즘 전통과 고대 헬라철학에서는 로고스와 사르크스, 말씀과 육신이 서로 반대되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사상의 특징은 이원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헬라인들에게는 로고스라는 게 곧 절대적 개념, 초월적인 개념, 형이상학적 개념이었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최고의 신, 우주의 제일 원인자인 이데아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헬라 사람들의 그런 전통적인 사상과 철학을 차용해서 기독교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한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말씀이 계시니라 그 로고스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면서 로고스가 사르크스, 즉 육신이 되신,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성탄이고,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게 이 요한복음의 메시지면서 또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대단히 충격적이고 거의 신성 모독에 가까운 가르침이었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믿는 절대 선이요 초월 존재인 로고스가 사르크스, 육신이 되셨다는 주장은 그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의 육체, 사르크스는 곧 어두움이고 영을 속박하는 감옥 같은 것이고 또 거짓이고 악마적인 것이었습니다. 반면 로고스는 참이고 빛이고 영원한 진리고 영이고 신입니다. 따라서 지고지순한 신이신 로고스가 어떻게 거짓되고 부패하고 악마적인 사르크스가 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어떻게 최고의 선인 로고스가 가장 거짓되고 악마적인 육신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한 게 뭐죠? 소위 가현설 아닙니까. 도케티즘(docetism)이라는 가현설입니다. 로고스 말씀이 정말 육신이 되신 게 아니고 단지 사람들 눈에, 우리 눈에 그렇게 육체처럼,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논리를 편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 최대 사이비 집단이었던 그노시스, 영지주의라는 헬라파 이단 아니었습니까? 한때는 그들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에 미혹돼서 헬라 문화권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지주의에 가담해서 오히려 정통교회가 약화되고 심각하게 흔들릴 만큼 굉장한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셨다는 주장,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성육신 사건은 확실히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요한복음 1장 10절 이하도 보십시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자기 땅에 오에 사람들이 다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성탄을 믿고,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인 성육신(incarnation)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씀이 굳이 육신이 되셨을까요? 왜 굳이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이 되셔서 아무도 알아주지도 환영하지도 않은 이 누추한 땅에 성탄하셨을까요? 성육신 사건의 진정한 사연과 비밀이 대체 무엇일까요? 또한 그 질문을 이렇게 역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성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육화되시지 않았다면, 성육신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한 타자로 남았을 겁니다. 양자 간의 소통과 교감과 이해와 교제가 영원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양자 간의 그 존재론적 간극 때문에 진정한 만남은 영영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초월 존재시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제약 속에서 사는 유한한 존재요 자연적인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그 둘이 각자의 차원에 그냥 머물러 있는 한, 인간과 하나님 간의 만남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같은 차원, 같은 세상에 살아도 서로 종이 다르면 이미 소통이 안 되잖아요. 같은 자연이고 같은 동물인데도 우리가 다른 짐승들과 대화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전자 구조가 사람과 97%나 같은데도 오랑우탄과 우리가 대화할 수 없잖아요. 종이 다르면 이미 신호음이 다르고 소통 코드가 다르기 때문에 그냥 새가 운다, 개가 짖는다고 하지 그들이 서로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들이 서로 어떤 사랑의 밀애를 나누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은 종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아예 존재론적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또 불쌍히 여기셔서 대화하시기를 원하셨고, 또 죄 가운데서 구원하사 우리가 다 영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만남과 대화가 필요했던 겁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이하입니다. “옛적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구약시대 때는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접적인 방식에는 한계와 문제가 있어서 결과적으로 소통이 그리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셨다구요?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게 됐다는 겁니다. 선지자들을 통한 간접 소통 방식이 아닌 보다 직접적인 소통 방식, 즉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게 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이 양자가 서로 만나려면 그래서 제대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늘 말씀을 드렸다시피 존재론적인 차원을 같게 해야 된다고 했죠.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든가, 사르크스가 로고스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던가, 사람이 하나님이 되든가 해야 비로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교감할 수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사람이 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사 이 땅에 성탄하신 겁니다. 그것은 같은 눈높이로 인간을 만나사 대화하시고 소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예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이 말씀을 버리고 육신이 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말씀이 완전한 육신이 되셨지만,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이 되셨지만 그분의 본질은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순간 말씀의 본질이 해소되거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순간 하나님의 본질이 상실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실제 우리 가운데 거하시지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즉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100% 하나님, 100% 하나님의 말씀이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존재 그 자체가 그분의 생애와 선포하신 모든 복음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또 주님은 그 존재 자체가 그대로 성자 하나님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그랬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올해도 성탄하시는 주님을 만나면 곧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만나는 겁니다. 주님은 저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사르크스처럼 보이신 게 아니라 로고스가 완전히 사르크스가 되신 분이고, 단순히 사람처럼 보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완전히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주님의 정체성을 말할 때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완전한 말씀이시고 완전한 육신이셨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성탄을 통해 이루어진 겁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됐고,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됐고, 주님과 대화하며 교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은혜고 큰 축복입니까? 성탄이 없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도 소통도 구원도 없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사 이 땅에 성탄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 모든 게 가능해진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고 축복입니까? 오늘 성서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말씀의 육화, 성육신 개념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진심으로 감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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