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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6] 나의 하나님이여! (시 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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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11월 첫 주일 아침 온라인 예배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희의 이 가정예배를 축복하사 주님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산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지금은 온 나라가 이태원 참사로 큰 슬픔에 빠져있습니다. 

희생된 젊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더는 이 땅에서 그런 황당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가서 안수해 주시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온라인 예배조차 쉽지 않은 성도들을 기억하사 그 가정의 모든 여건을 친히 원만케 해 주시옵소서.

 

주님,

가을이 깊어가면서 내일이 벌써 입동입니다.

겨울을 준비하고 주님과의 연말 결산을 준비해야 하는 이 때 저희들 더욱 깨어 근신하게 하사 올해도 아름다운 마감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해 주시옵소서. 

기도하게 하시고, 나만이 아니라 이웃들도 생각하게 하시고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상고할 때 주님의 뜨거운 육성을 듣게 하시고 저희 가족들이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만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106

시 40:1-8

나의 하나님이여!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 시편 4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이죠. 어떤 하나님이요? 당연히 그동안 자신이 믿고 체험한 하나님, 다윗이 그동안 찬양하며 기도하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나의 하나님이여 그럽니다. 8절에서도 나의 하나님이여 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다윗이 직접 체험한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그 하나님이 과연 어떤 하나님, 누구의 하나님이냐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던 하나님인지, 바울의 하나님이고, 목회자의 하나님인지 아니면 오늘 나의 하나님인지 하는 문제는 실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진정한 신자입니다. 남이 하나님이 있다고 하니까, 남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하니까, 나도 덩달아 믿는 하나님은 아직도 남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파스칼은 평생 자신의 옷깃 안쪽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쓴 천 조각을 바늘로 꿰매고 다녔습니다. 꿰매고 살았습니다. 그게 그의 신앙 고백이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파스칼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파스칼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그렇게 고백해야 정답입니다. 

 

그럼 이제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나의 하나님이여 하며 고백하고 증언한 하나님은 대체 어떤 하나님이신지 한번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다윗이 진술하는 하나님이 곧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뭐라고 했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려야 응답하시는 여호와이시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우리는 보통 기도하면 간구나 회개, 고백 같은 것만 기도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기도 행위이고 또 기도 응답을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죠. 오래 기다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절박한 탓도 있고 또 우리가 정서적으로 너무 조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기도 자체를 곧잘 접습니다. 실은 이 지구력의 한계와 인내심의 부재가 우리의 기도 생활에 얼마나 큰 장애요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분명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비로소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은 오래 인내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나 여기 있다거나 네가 원하는 것 당장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고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려야 비로소 응답하시는 걸까요? 야고보서 1장 12절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약속하신 것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다고 무엇이든 무조건 응답하시는 게 아니십니다. 일단은 우리를 시험해보십니다. 우리의 그 기도가 얼마나 절실하고 진지한지 얼마나 간절하고 진솔한지 먼저 그 진정성을 검증해 보신 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람 잡고 조급하게 굴며 발 구른다고 거기에 휘둘려서 본의 아니게 응답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지금 두 발이 기가 막힌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죽 다급하고 절박하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일단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나는 지금 불안하고 초조하고 너무 마음이 급해서 죽겠는데 수렁에 빠진 두 발이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는데 주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죽을 맛입니까? 

 

주님은 친구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계속 늑장을 부리시다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야 베다니에 나타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런 주님이 너무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장례한 시체가 부패해서 냄새가 나는데 주님인들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주님은 사람들이 다 늦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체념한 바로 그 지점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셨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엄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판단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 주님이 나타나시는 순간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때요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내 시간표에만 연연하고 내 시간표만 고집하죠. 내 시간표대로 주님이 따라와 주시기를 강요하며 떼쓰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다 그게 안 되면 지레 포기하고 체념하죠.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요단강에 가서 몇 번 목욕했습니까? 일곱 번이죠. 자존심이 있는 대로 다 상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일곱 번 목욕을 다 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짓물렀던 살이 어린아이의 피부같이 곱고 깨끗해지더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때 나아만 장군이 꾹꾹 참다가 결국 다섯 번이나 여섯 번까지만 하고 더는 못하겠다며 던져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자신의 나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여리고성은 또 어떻게 해서 무너졌습니까?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씩 성을 돌고 마지막 이레째는 일곱 바퀴를 돌았는데, 이레째 여섯 바퀴를 돌 때까지도 성은 멀쩡했고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성체가 일곱 바퀴를 다 돌자 비로소 무너졌습니다. 

 

엘리아는 또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몇 번 기도했습니까? 일곱 번 했죠. 여섯 번 기도할 때까지는 아직 비가 안 왔습니다. 일곱 번을 다 하자 비로소 저 바다 쪽에서 손바닥만한 비구름 하나가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땅에 장대비를 퍼부었습니다. 

 

여기 계속 일곱 번, 7이라는 수가 나오죠.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7은 완전수, 만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시간이 다 차야 비로소 응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다리십시오. 아니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시오. 내 시간표대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시지 말고 아무리 내 두 발이 다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셔야, 하나님의 시간이 차야 비로소 나를 그 수렁해서 끌어 올리사 어떻게 하신다구요?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향하신 기적도 많고 생각도 많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기적이 많으십니다. 

 

그럼에도 결코 기적에 헤프시거나 기적을 함부로 난발하시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기적 못지않게 생각도 많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덮어놓고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먼저 깊이 숙고해보십니다. 이 기적이 정말 우리에게 독이 아니라 약이 되고,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것인가를 먼저 깊이 생각해 보신 후에 허락하십니다. 기적이라는 게 항상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덕이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중하십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여러 차례 기적을 주문했지만 주님은 그 유혹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그럼에도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게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하신 겁니다. 이사야 55장 8절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서로 많이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단순하고 경박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깊고 신중하고 옳으십니다. 우리는 지금 꼭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고 생각하시면 주시고, 아무리 우리가 생떼를 써도 하나님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시면 절대 안 주십니다. 기적이 궁해서가 아니라, 기적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 대한 생각이 깊으셔서 그렇습니다.

 

사실 복음서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통해 기적을 체험합니다.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사람들, 병 고침을 받은 무수한 사람들, 귀신에게 놓여난 사람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 중에 과연 끝까지 주님을 따른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없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까?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 아닌 게 있었습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고,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고, 갈라진 홍해를 건넜고,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성공했습니까? 다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었습니까? 아닙니다. 다 실패했습니다. 날마다 기적을 먹고 마셨지만 다 망했습니다. 60만 출애굽 1세대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더 많은 기적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우리가 과연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고 관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기적을 욕되게 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채비가 돼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원하고 바란다고 해도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으로 인해 우리가 복되기를 바라시지 결코 망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로또에 당첨되는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게 대부분 축복보다는 재앙이나 저주가 되잖아요. 그 행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감당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부디 올해도 주님의 많은 기적이 여러분들께 불행이 아니라 아름답고도 풍성한 은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립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은 제사나 예물보다 나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본문 6절 이하 7절 상반절까지 보십시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시는지라 그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 최종적으로 바라시는 것은 결코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이 아닙니다. 바로 나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나 제물은 곧 나를 바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 대신 흠 없고 티 없는 짐승을 잡아 바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나 대신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면 우리가 바치는 그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제물로 받으시는 게 아니라 그 대속물이 곧 나라고 생각하시며 흠향하시고 열납하십니다. 

 

그래서 그 제사가 산제사가 되는 겁니다. 비록 나는 내 대신 짐승의 피와 고기를 바치지만 하나님은 그걸 살아있는 나를 바치는 것으로 간주하고 접수하시기 때문에 그게 곧 산제사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제사는 그야말로 죽은 짐승의 피와 고기를 바치는 죽은 제사일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까? 이게 다 나를 드리는 것이지 그냥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종교의식을 바치는 행위가 아닙니다. 헌금이란 돈이라는 그릇, 용기에 나를 담아 드리는 예물입니다. 주일 성수란 한 주간의 첫 시간이라는 용기, 그릇에 나를 담아서 드리는 제사 행위입니다. 예배란 종교의식이라는 그릇에 나를 담아서 하나님께 바치는 헌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최종적인 바람은 바로 나라는 것이지 결코 돈이나 시간이나 의식이나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나 종교 의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뭐라고 합니까? 좋습니다. 돈도 드리고, 까짓거 주일 하루도 드릴 용의가 있고 예배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절대 요구하지 마십시오. 저를 바치라거나 저를 원한다는 말씀 따위는 하지 마십시오. 미안하지만 저는 안 됩니다. 

 

여러분, 그건 예배도 아니고 헌상도 아닙니다. 그게 아무리 초라하고 소박한 예배나 헌금이나 주일 성수라고 해도 나를 바칠 때만 산제사이고, 아무리 대단하고 거창한 의식이나 찬양이나 헌금이라고 해도 나를 바치지 않는 예배는 절대 죽은 예배입니다. 죽은 제사입니다. 바울은 네 몸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라고 했고, 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너의 존재로, 너의 전부로, 온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나 깨나 나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나를 제물로 헌상하는 의식이 바로 예배입니다. 부디 여기 다윗처럼 또 바울처럼 내가 왔나이다. 나를 받으소서 하며 결단하므로 늘 자신을 하나님께 헌상하는, 늘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며 예배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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