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30]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다 (행 15:36-41)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10월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이 시간도 온라인 예배로 주일을 지키는 저희 가정에 은혜를 베푸사 이 예배가 주님께 기쁨이 되고 저희에게는 축복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어느새 10월도 다 지나갔습니다.
남은 두 달, 더욱 기도하고 사랑하고 믿음에 힘써 2022년도 주 안에서 잘 마감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세상은 여전히 극도로 불안정하고 팍팍해 누구도 살아가기가 힘든 이 때 저희들 더욱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 가사 안수해 주시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온라인 예배조차 쉽지 않은 가정들을 위로하사 그 모든 여건을 주님이 친히 평정해 주시옵소서.
<4주간 특별새벽기도회>가 금주로 끝납니다.
올해도 주의 가정들의 간절한 바람과 절절한 기도 제목들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주님이 친히 응답하시며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제 말씀을 상고할 때 뜨거운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저희 가정 온 가족이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을 살피며 결단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만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030
행 15:36-41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사람의 기질이나 성품이 바뀔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 성질 급한 사람이 느긋해지고 또 뾰족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질까요?
사도 요한은 하도 버럭 화를 잘 내서 주님이 보아너게라고 하셨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그런데 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사랑의 사도가 됐습니다. 말년에는 100살 가까이 된 그를 에베소교회 제자들이 들것으로 모셔다가 강대상 높은 곳에 앉혀 놓으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늘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 말만 했는데도 노 사도의 그 말씀에 교회가 항상 눈물바다가 됐다고 하잖아요. 그런 말씀이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본래 그 사람의 정서나 기질이나 성품이 그렇게 요한처럼 변할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변하셨습니까? 내성적이던 분은 외향적으로 바뀌고, 소극적이던 분은 보다 적극적으로 변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던 분은 예수를 믿고부터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으로 바뀌었습니까? 다혈질이던 분은 담즙질로 바뀌었습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의 성격이나 정서, 그리고 기질에 대한 불만이 참 많죠.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자신의 그런 성품이 바뀌고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 바람만큼 잘 안 되죠. 왜 그럴까요? 정말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성품이 바뀔까요?
여러분, 모세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민수기 12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세상에서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그렇다면 그토록 온유했다는 모세가 땅을 기업으로 얻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문턱인 비스가산에서 요단강 건너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가장 외롭게 고독하게 죽었습니다. 더 억울한 건 그때 모세의 나이가 120세였지만, 아직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째서 그가 요단강만 건너면 되는 가난에 못 들어갔을까요? 분명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는데요. 므리바 사건 때문이잖아요. 므리바 사건이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대들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백성들을 다 모으고 그들 앞에서 저 반석을 향하여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분부하신 대로 백성들을 다 모으고는 어떻게 했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그야말로 불같이 화를 내며 가지고 있던 자신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차례나 후려쳤습니다. 물론 샘은 터졌습니다만 그 일로 하나님이 모세의 그 분노와 혈기를 문제 삼으시며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그러셨어요. 그토록 온유했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성질을 부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함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긴 겁니다.
제가 오늘 봉독해드린 본문은 2,000년 기독교사에서 최초의 이방 선교사, 해외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선교 여행을 앞두고 대판 싸우고는 결국 서로 갈라서는 대목입니다. 이 두 사람은 원래 성령의 계시로, 성령의 지시로 한 팀을 이루어 해외선교에 나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투고 싸우고는 허무하게 서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다툼에서 훨씬 더 흥분하고 강경했던 사람은 역시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 전도여행에 자기의 사촌이자 후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마가가 제1차 전도여행 때 동행하다가 힘들다며 도중에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그런 전력을 문제 삼아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습니다.
여기 바나바는 원래 돈 많고 땅 많은 부자였는데, 성품도 대단히 온유하고 관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뭐였습니까? 사도들마저 그를 다 존경하며 권위자라고 했습니다. 권위자란 권하고 위로하는 자 그런 뜻입니다. 권위자, 이 권위자에서 바로 요즘 교회 주요 직분인 권사가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바나바가 바로 권사의 원조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에는 남성 권사도 있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바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워낙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위장 회심을 한 것으로 의심하며 극도로 그를 경계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신원보증을 서고 바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그의 기독교 적응을 적극 도왔습니다. 사실 바나바가 바울의 유일한 멘토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성격은 그와 정반대였죠. 아주 강직하고 열정적이고 다혈질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을 보면 바울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얼마나 과격합니까? 역시 갈라디아 2장 11절 이하에도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베드로 사도를 바울이 여러 성도들 앞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한 겁니다. “나는 그가 복음의 진리를 떠나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하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답게 살지도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 하느냐 하였노라” 바울이 베드로를 향해 공개적으로 그따위로 살지 말라며 비난했다는 겁니다.
바울은 사실 회심하기 전에도 그랬잖아요. 갈라디아서 1장 13절 이하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동년배보다 유대교를 더욱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하여 열심이었노라” 실제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고, 그 후에도 믿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결국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심을 했는데, 주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그런 불같은 성격이나 기질을 남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바울처럼 열정적이고 헌신적이고 순교적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옛날 유대교를 믿을 때도 자기가 지나칠 정도였다고 했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것은 곧 회심한 후에도 그의 기본적인 성격이나 기질이나 성품이나 정서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성격이나 성품 때문에 고민스러워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왜 자신의 성질이 변하지 않느냐며 좌절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자기가 제대로 거듭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냐며 비관하고 낙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의 고유한 정서는 거의 안 변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순화는 되겠죠.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성질 급한 사람이 느긋해지는 것도 아니고, 예민한 사람이 둔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예수를 믿으면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했는데 그건 무슨 소립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으면 성품이 변해서 천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소속과 운명이 변하고 신분이 달라진다는 뜻이지, 성격이 변하고 기질이나 정서가 완전히 바뀐다는 뜻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이고, 전에는 사탄의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는 것이고, 전에는 마귀가 배후에서 나를 조종했는데 이제는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고 강제하시는 사람이 됐다는 뜻입니다. 성격이나 기질이나 정서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색깔이고 개성이고 품성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만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의 품성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데, 전에는 바울의 그 다혈질이 오직 교회를 핍박하고 교인들을 색출해서 처단하는 쪽으로 사용이 됐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 성격과 그 기질이 교회를 뜨겁게 섬기고 사람들을 열심히 구원하는 쪽으로 발동이 되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으면 내 성격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지, 내 성질 자체, 기질 자체, 품성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성격이나 정서는 다 하나님의 고유한 선물입니다. 축복입니다. 나의 개성입니다. 따라서 다 소중한 겁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거나 미워하거나 비관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존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다만 이제는 성질을 부리는 방향이 바뀌고, 내 성품을 발동하는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날카로우면 날카로운 대로, 오직 그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주로 이웃을 해치고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제를 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 성품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똑같은 칼이지만 전에는 주로 남을 해치는 흉기로 사용했는데 이제는 곪은 부위를 째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메스로 쓴다는 겁니다. 똑같은 돈인데 전에는 술 마시고 클럽 가서 춤추고 마약하고 도박하고 방탕하며 탕진했는데 이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데 혹은 선교하는 데 씁니다. 똑같은 성격이고 똑같은 성질이고 똑같은 정서인데 이제는 그 성품을 발동하는 방향이 많이 달라진 겁니다. 추구하는 목적이 많이 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성질 급한 사람은 느긋해지고, 깐깐한 사람은 만고강산이 되고, 쫀쫀한 사람은 통 큰 사람이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모세의 경우도 우리가 그 므리바 사건을 얼핏 보면 마치 모세가 백성들 앞에서 성질을 부려서 하나님이 모세를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시고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해석은 너무 평면적이고 피상적입니다. 무리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천하가 없어도, 수시로 하나님을 대면하기까지 한 모세라 할지라도, 율법으로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잖아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우리가 율법서라고 하는데, 모세가 썼다고 해서 모세오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율법의 화신 같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그를 굳이 못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만 천국 간다는 사실을 널리 계시하신 겁니다. 그 사건을 통해, 모세의 희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므리바 사건을 오직 모세의 성질이 부른 비극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보는 것은 그 사건이 가지는 심오한 계시적 의미, 복음적 의미를 놓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정서나 성품을 다 인정하시고 존중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개성 있는 성품과 기질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겁니다. 자신의 고유한 정서와 성질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겁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소심하면 소심한 대로, 과격하면 과격한 대로, 깐깐하면 깐깐한 대로, 그 성질과 그 성품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기여하라는 겁니다.
성도들 간에도 그렇습니다. 남이 나와 다르다고 나와 취향이 다르고 정서가 다르고 기호가 다르다고 하여 틀렸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다못해 찬송을 부를 때도 다 서로 다릅니다. 어떤 분은 꼿꼿이 앉아서 입도 크게 안 벌리고 부르지만 또 어떤 분은 크게 부르고 박수까지 칩니다. 기도도 어떤 분은 속으로 하지만 또 어떤 분은 큰 소리로 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각자의 개성과 기질과 정서를 서로 존중하고 타협하며 함께 가라는 겁니다. 내 정서에 안 맞는다고 함부로 배제하고 적대하고 결별하면 그건 결코 신앙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바울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그렇게도 불같이 화를 내며 마가를 반대하고 자기의 은인이다시피 한 바나바와 싸우고 갈라서기까지 했는데, 말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네가 내게 올 때 꼭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내게 유익한 사람이라” 펄펄 뛰며 반대할 때는 언제고 다시 그가 내게 유익하다며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은 또 뭡니까? 펄펄 뛸 때는 예수를 처음 믿을 때고, 이제는 바울도 그만큼 성화가 됐다는 뜻입니다. 비록 나와 다르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그를 용납하고 함께 가고, 그를 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모두 자신의 성격이나 정서 같은 성품에 대해 좀 더 확신을 가집시다. 주님은 내 성품이 바뀌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고 내가 나의 고유한 성질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남의 성품에 대해서도 좀 더 관대합시다. 그게 그 사람의 개성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선물이요 은사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존중하고 타협합시다. 그게 바로 서로 성품이 다 다른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바람이시고 또 성령의 기대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내게 주신 나만의 고유한 성품으로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 이미지: 원래 주소 열기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