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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9] 남은 너희여 들으라! (사 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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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감사합니다!

10월 둘째 주일 아침 온라인 예배로 주일을 지키는 저희 가정 위에 주님의 크신 축복과 긍휼을 허락하시고, 이 조촐한 가정예배가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오늘은 특별히 <한글날>입니다.

저희 민족에게 뛰어난 글과 말을 주사 고유한 저희의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저희들, 모국어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저희 민족에게 주신 이 한글을 잘 보전하고 아름답게 갈고 닦는 일에 우리 믿는 자들이 앞장 설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찾아가 주시고 안수해 주시옵소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온라인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는 가정이나 개인도 긍휼히 여기사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시옵소서. 

 

벌써 기온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저희의 건강을 지키사 이 환절기도 모두 탈 없이 지내게 하시고, 주님과의 연말 결산도 잊지 않게 하사 더욱 시간을 아끼며 열매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족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올해도 기도로 승리하도록 기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깨달음을 주시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결단하는 복 된 자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009

사 46:3-5

남은 너희여 들으라!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그러셨는데 이 말씀을 오늘 이 시대에 적용을 한다면, 야곱의 집은 어떤 집이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또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이 될까요?

 

당연히 오늘 우리 믿는 자들의 가정이 야곱의 집이고 또 힘들고 고된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 기도하며 사는 우리들이 바로 이 시대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어려운 시대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을 따라가며 오직 말씀으로 살고자 애쓰는 오늘 우리들을 향해 내 말을 들을지어다 하시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이 본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시대 야곱의 집인 우리 믿는 가정들을 향해, 또 이 시대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인 우리 소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과연 뭐라고 하셨는지, 어떤 말씀을 주시기 위해 들으라고 하셨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먼저 3절과 4절을 보면,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를 안고 가겠다, 가슴에 품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이고 다짐이십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네 집을 내 따뜻한 가슴에 품고 가마, 내가 언제 어디서나 널 내 사랑의 품에 안고 가마.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죠.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393장도 같습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니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진실하게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우리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기 가슴에 고이 품고 가실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툭하면 주님의 그 사랑을 의심하죠. 지금도 아마 그런 분이 계실 겁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자기를 많이 사랑해 주셨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겁니다. 또 개중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자기를 버리신 것 같다고 느끼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겁니다. 내 감정, 내 사랑이 식은 겁니다. 내 믿음이 추락하고, 내가 초심을 잃고 이전과 달라진 겁니다. 내일이 음력으로 9월 15일 보름입니다. 여러분, 보름달이 훤히 비칠 때, 저 율동공원 연못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어떻게 됩니까? 당장 파문이 일어서 연못에 떠있던 보름달이 산산조각 납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어떻습니까? 거기는 여전히 밝고 멀쩡한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습니다. 그것처럼 언제나 주님이 아니라, 내 마음, 내 믿음에 파문이 일어 주님의 모습이 흔들리고 때로는 일그러지고 실종되는 겁니다. 실제 주님의 모습, 실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여전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오늘도 변함없이 나를 품에 안고 가십니다. 

 

또 우리는 툭하면 내 잘못을 주님께 뒤집어씌웁니다. 내 책임을 다 주님께 떠넘기죠. 흔히 우리가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쁜 짓을 할 때 어떻게 하죠? 그게 알량한 신앙 양심에 걸리니까 속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좀 말려주십시오. 저를 좀 못된 짓 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그러나 결국은 죄를 짓고 맙니다. 

 

그러고 나서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합니까? 다시 모든 책임을 주님께 돌리죠. 저는 분명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저를 말리시지 않았습니다. 저도 잘한 건 아니지만 주님께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교활하게 자신의 잘못을 주님께 전가하며 주님을 탓하는데도, 주님은 결코 네가 틀렸다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 품에서 내치시지 않고 여전히 나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고 가신다는 겁니다. 괜히 내가 제 바람에 회의에도 빠지고 원망도 하고 낙심도 하고 포기도 하며 갈팡질팡하는 것이지,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절대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주님이 나를 당신의 품에서 내쫓았다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주님은 분명 나를 태에서부터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당신의 품에 안고 가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3절 하반절에서는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라고 하셨고, 4절에서는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내가 너희를 업어주겠다, 내가 너희를 업고 가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를 도와주시겠다, 우리를 안전하게 평안하게 보호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육아 방식이나 문화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전에는 우리가 다 엄마 등에 업히고 누나 등에 업히고 언니 등에 업혀서 컸습니다. 울다가도 등에 업히면 그치고, 또 등에 업히면 따뜻하고 아늑하고 평안해서 곧잘 잤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평생 당신 등에 업어주시겠다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해드린 모래 위 두 발자국이라는 시 기억나시죠? 올해도 벌써 3/4이 지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4/4분기만 남았습니다. 여러분, 지난 9개월 동안의 발자취를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모래 위에 주님과 나,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나있죠.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틀림없이 군데군데 둘이 아닌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곳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다 내가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려웠을 때였다는 사실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 때는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였고 또 사업에 실패해서 막대한 손해를 입고 괴로워할 때였고 부모님이나 가족을 잃고 슬퍼할 때였고 실직을 해서 가장 막막해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가 가장 절실한 때였는데, 놀랍게도 그때마다 발자국이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 때는 주님이 내 곁에 안 계셨다는 얘기 아닙니까? 따라서 내가 너무 서운해 주님, 왜 저 때는 저만 홀로 두셨습니까? 제가 가장 힘들고 가장 외롭고 가장 아플 때 왜 저만 두시고 주님은 제 곁을 떠나셨나요? 그렇게 항의를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신다구요? 

 

얘야 나는 올해도 네 곁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단다. 지난 9개월 동안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걸었단다. 저기 모래 위에 찍힌 한 사람의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나의 발자국이란다. 저 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하고 너무 괴로워하고 너무 슬퍼하고 아파해서 내가 너를 아예 등에 업고 걸었단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혼자 난리입니다. 내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주님을 떠났다, 삐졌다 하며 온갖 변덕을 다 부리는 것이지, 주님이 내게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품에 안고 또 등에 업고 가십니다. 내가 허무하게 팥죽 한 그릇에 내 영혼을 팔고 주님을 팔지, 주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버리시거나 팔지 않으십니다. 오죽하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셨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내가 너를 꽉 움켜쥐고 가겠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 놓치지 않겠다. 내 통에서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우리는 천사들을 부러워하죠. 왜요? 천사는 날개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주연이지 천사가 주연은 아니라는 겁니다. 천사들은 엑스트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천사들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업어서 키우시지만, 천사들은 절대 안 업어주십니다. 천사들은 다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도리어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날개는 없지만 지위나 신분으로 말하면 우리가 훨씬 더 높습니다. 우리가 훨씬 더 귀합니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6장 3절은 장차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천사들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는 천사들보다도 우리가 더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천사들은 안 업어주시지만 우리는 끝까지 업어주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서 뭐라고 하셨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셨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주님과 바울은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셨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은 맞지만, 주님을 핍박한 적은 없는데도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늘 자신과 당신이 업고 가시는 우리를 동일시하십니다. 하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핍박을 당신이 당하시는 것으로 여기시며, 우리의 모든 아픔을 다 대신 당해주십니다. 우리는 그걸 모두 내가 당하고, 내가 다 홀로 겪는다고 생각하며 아파하고 억울해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건 다 엄살입니다. 

 

사실은 주님이 지금 내 대신 주리시고, 주님이 지금 내 대신 목마르시고, 주님이 지금 내 대신 헐벗으시고, 주님이 지금 내 대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시며 신용불량자가 되셔서 온갖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다 당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요? 내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평생을 그렇게 나를 당신 등에 업고 가신다고 합니다. 부디 나를 이렇게 등에 업고 가시며 내 대신 모든 것을 당해주시고 막아주시고 또 지켜주고 계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4절 하반절인데, “구하여 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반드시 너희의 구원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십니다. 부부는 이혼을 하면 남이지만, 부모 자식 간은 그렇지 않죠. 부모 자식은 법적인 관계, 물리적인 관계가 아니라 혈연관계요, 화학적 관계요, 운명적 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혈연관계보다 더 질기고, 더 진하고, 더 영원하고, 더 절대적인 영적 관계입니다. 오죽하면 여인이 혹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겠습니까. 오죽하면 칼도 사망도 천사들까지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하셨겠습니까.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다 제 바람에 강해졌다, 약해졌다, 버림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 것이지, 실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주님을 붙잡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놓으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고 생각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때로 주님을 잡고 가던 손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나를 붙잡고 가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나를 안고 업고 가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손을 놓는다고 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 다시 그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칩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알미니안주의, 즉 웨슬레파인 감리교 계통이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구원받은 자도 다시 버림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 칼빈주의, 장로교 쪽에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 무효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은 그 어떤 죄도 주님이 이룩하신 구원을 무효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효화되기에는 주님이 이루신 우리의 구원이 너무 크고 너무 값지고 절대적이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가 늘 이렇게 못나게 구니까 주님이 이제 나를 미워하셔서 내 구원을 철회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못난 짓이고 결코 장로교인 답지 않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주님이 당장 하나님 앞에 나서서, 하나님, 그래서 제가 대신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미 십자가에서 저 죗값을 다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하며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선택이나 결단이나 판단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지금 우리의 삶의 변수나 복병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것만큼은 천지가 뒤집힌다고 해도 분명합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내가 너를 구하여 내리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신실한 약속과 절대적인 구원의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면 되잖아요. 여기서 뭘 더 바라십니까? 뭐가 더 필요하십니까? 

 

부디 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를 오직 주님의 이 사랑과 보호와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기시며, 그 누구보다도 담대하게 용감하게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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