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221002] 각각 선악 간에 (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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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어느새 오늘이 10월 첫 주일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온라인 주일예배를 드린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저희 가족을 긍휼히 여기사 오늘도 이 가정예배를 통해 주님을 뵙고 성령과 교감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신령과 진정을 다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일교차 큰 환절기입니다. 

저희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늘 주 안에서 몸도 마음도 영혼도 강건하게 하시옵소서. 

환자들을 안수하사 하루 속히 쾌차하게 하시고, 온라인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는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사 더 큰 믿음과 이런저런 여의치 못한 사정들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주님, 설악산 단풍 소식과 함께 가을 느낌이 조금씩 더 묻어나고 있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차분히 자신을 살피며 올해도 주님께 바칠 열매를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해 주시고, 마음의 간절한 바람들을 기도하여 응답받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부단히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상고할 때 은혜를 더하시고, 회개하며 결단하는 저희 가족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만복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1002

고후 5:8-10

각각 선악 간에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러분, 훗날 우리 믿는 사람들도 심판대 앞에 설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요?

 

제가 소개해드린 오늘 본문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란 누굽니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우리도 다 그리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각각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받는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다지 감동이 없습니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착잡하죠. 어떻게 믿든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된다, 천국 간다는 데서 끝나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각각 그동안 어떻게 믿었느냐, 또 어떻게 살았느냐를 따져서 그 등급에 따라 상급을 준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언짢아합니다. 더구나 우리 개신교는 원래 가톨릭의 공로사상, 공덕 사상, 즉 행위를 강조하는 교리에 반발해서 독립한 교회 아닙니까. 행위는 율법이고 구원은 갑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데, 가톨릭이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주님의 복음을 저버리고 다시 옛 율법주의로 돌아가 버렸다는 게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가들의 비판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우리 개신교는 태생적으로 행위라든가 상급 혹은 공덕 같은 얘기를 하면 아주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고 또 성경의 가르침에도 위배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절대 우리의 노력이나 희생의 대가로 혹은 삶의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 즉 영화는 반드시 내가 이 땅에서 각각 선악 간에 내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이요 대가요 그 반대급부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천국도 구원도 중요하지만,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받는 상급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걸 우리는 흔히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흔히 어떻게 표현합니까? 이 땅에서의 성화가 천국에서의 영화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떠나면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심판은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판결이 아니고, 이 땅에서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는 상급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천국이라고 다 같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의 영화에도 급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설마 천국에서까지 차등이 있을까 그럽니다. 이 땅에서야 그런 일이 많죠. 온갖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계급도 있고 차별도 있고 불공평이며 불평등한 일이 다반사여서, 우리는 누구나 늘 억울한 일을 당하며 또 못마땅한 일들을 겪으며 삽니다.  

 

그러나 천국만큼은 절대 그런 차별이나 등급 같은 게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옳습니다. 천국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공정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공평한 세계지 평준화의 세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사람들이 누리는 영광이 다 다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모든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각각 그 행한 대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상급도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반드시 달라야 그게 진정한 공평이고 공정한 심판이 된다는 겁니다. 

 

이미 엄마 뱃속에서부터 믿은 모태 신앙이나 숨 떨어지기 30초 전에 회개하고 천국 간 한편 강도가 천국에 가서 누리는 영광이 똑같다면 그건 불공평한 거죠. 그건 공정이 아니죠. 정의가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삼십대에 회심해서 평생을 오직 주님만을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사람과 사형당하기 직전에 회개하고 죽은 어떤 살인강도가 천국에 가서 똑같은 대우를 받고 똑같은 영광을 누린다면, 그걸 우리가 어떻게 정의라고 할 수 있으며 공평하고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상급은 다 달라야 합니다. 상급은 다 다릅니다. 상급에는 반드시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내용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영광도 다 달라야 그게 진정한 공평이고 공정이라는 겁니다. 만약 상급이 다 같다면, 그야말로 역차별이죠. 불공정이고 불평등한 거죠. 사람마다 삶의 내용이 다 다른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상급이 다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1절은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이 다르고 또 별 중에서도 샛별의 영광, 은하수의 영광, 북두칠성의 영광이 다르듯이 천국에서 누릴 각 사람의 영광도 다 그렇게 다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후서 12장 1절 이하에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간증하면서 자기가 14년 전에 삼층천, 즉 셋째 하늘에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후 1300년대 초에 쓴 단테의 [신곡]에도 지옥과 천국이 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옥이라고 다 같은 지옥이 아니고, 제1지옥에서부터 아래로 제9지옥까지 내려갑니다. 당시 단테가 본 그 제1지옥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있고, 제2지옥은 좀 더 고통스러운 곳인데, 클레오파트라가 있습니다. 조폭과 같은 폭력배들은 제7지옥으로 가고, 제일 깊고 어둡고 가장 고통스러운 제9지옥에는 가룟 유다와 가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도 그렇습니다. 제1천국에서 제10천국까지 구분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천국을 3층이라고 했는데, 삼층천이라고 했는데, 단테는 십층천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높을수록 더 밝고 더 영광스럽고 더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제일 높은 하늘인 십층천을 엠피리오(empireo)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아래 제9천국에는 천사들이 있고, 그 아래 제8천국에는 순교자들과 사도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역도 천국도 다 이렇게 공정한 등급이 있다는 겁니다. 천국은 절대 로또가 아니라는 거죠. 이 땅을 거쳐 간 모든 인생들의 삶의 내용이 선악 간에 가장 냉정하게, 가장 엄정하게 평가되어 가장 공정하게 그 보상과 상급이 이루어지는 평등의 세계요, 공평의 나라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유명한 므나 비유가 나오죠. 주인이 열 명의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기는데, 한 사람은 그것으로 장사해서 무려 열 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그 한 므나로 장사해서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훗날 주인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습니까?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줬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수고한 대로, 열심히 장사해서 이익을 낸 대로 정확히 결산하고 보상했다는 겁니다. 다섯 므나 남긴 자에게 다섯 고을, 열 므나 남긴 자에게 열 고을을 보상했습니다. 훗날 천국에서도 그렇게 각자가 남긴 만큼 보상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의 최후 상급이고, 장차 우리 각자가 누리게 될 천국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 이하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한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선지자의 상, 의인의 상, 냉수 한 그릇의 상이 각각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수고도 그 어떤 희생도 하다못해 냉수 한 그릇의 자선까지도 절대 공짜는 없습니다.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치 마일리지가 쌓이듯이 차곡차곡 내 상급, 내 삶의 포인트가 천국의 슈퍼컴퓨터에 알뜰하게 다 누적돼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한마디로 보상을 물은 겁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어지는 28절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주님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희생한 사람들은 훗날 천국에 가서 여러 배의 보상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큰 상을 얻지 못하리라 저희는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느니라” 얼마나 냉정하고 가혹하고 공평무사하신 말씀입니까.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19장 30절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 먼저 믿는 자라고 다 큰 상을 받고, 나중 믿었다고 다 작은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대로 받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간혹 성도들 가운데는 하루 빨리 천국을 갔으면 좋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바울도 “우리가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랬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꼭 하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빨리 천국으로 안 데려가시고 가능하면 하루라도 더 이 땅에 두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을 조금이라도 더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천국이 보장됐다고 해도 빨리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 구절의 말씀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가장 책임적으로 관리하고 준비하는 삶의 참 모습이라는 게 오늘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을 기쁘게 하거나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그 보상을 다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천국에 가서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부디 천국에 가서 누릴 해 같은 영광을 위해, 생전에 모두가 좀 더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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