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 아버지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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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추석 연휴 중에 맞은 주일입니다.
오늘도 저희의 마음을 다스리사 주님을 예배하며 기도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투명한 영성으로 성령과 교감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시간이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환자들을 찾아가사 안수해 주시고 오늘도 온라인 예배조차 드리기가 여의치 않은 가정들을 기억하사 더 큰 믿음과 주일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는 저희들 모두 주님의 사랑을 가슴 가득 품고 가족들 형제들 이웃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는 복된 시간을 갖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온라인 주일예배를 통해 주님의 육성을 들으며 성령의 깊은 위로와 소망을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주일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자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0911
눅 15:11-24
아버지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이 본문은 주님의 수많은 비유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극적이고, 또 가장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또한 다 고향을 찾고 부모님을 찾는 추석 같은 명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이걸 탕자의 비유라고 해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사실은 탕자가 아니라 탕자의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집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아들을 기다리고 용서하고 받아준 아버지의 사랑에 맞춰져 있습니다.
17세기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렘브란트의 생애 마지막 작품도 바로 오늘 이 본문을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그 작품은 지금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관에 있는데 그 그림 역시도 제목은 돌아온 탕자지만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돌아온 아들은 그냥 거지 행색으로 시커먼 발바닥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버지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고, 아버지는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신비한 감동을 느끼는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렘브란트는 그 그림을 완성하고 1669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본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가 불쑥 아버지 앞에 나타나서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는 과거 우리나라처럼 철저한 가부장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게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됐습니다.
그러나 재산분배만큼은 엄격한 사회적 기준이 있어서 아버지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 집처럼 아들이 둘인 경우는 맏아들에게 삼분의 이, 둘째에게는 삼분의 일을 상속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도 그런 법적인 근거로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한 겁니다.
다만 재산의 상속 시기는 보통 아들이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할 때 이루어졌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정년기는 18세에서 2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이 둘째 아들은 아직 미혼으로 많아봤자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아버지 집을 떠나겠다며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고, 아버지도 떠나겠다는 아들을 강제로 붙잡아 두지 않고 아들의 요구대로 그의 몫을 나눠줍니다. 아들은 이미 나름대로 다 준비하고 계획한 듯이 아버지가 나누어 준 재산을 신속하게 처리해서 서둘러 집을 떠납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그가 먼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간섭이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저 세상 한복판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누구나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귀소 본능도 있지만, 또 이렇게 아버지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멀리 달아나고 싶어 하는 가출 본능, 도피 본능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거의 잊고 지내다가도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다 귀성길에 오르잖아요. 그게 바로 귀소 본능의 발동이자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록 멀리 떠나있긴 하지만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향수도 느끼고 또 아버지 품에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에도 시달리는데, 다행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경이라는 가이드북이 있어서 아버지의 품을 제대로 찾지만, 안 믿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 그것은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누구도 못 말린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아니면 우상이지 무신론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인간에게는 아버지의 간섭이나 통제를 벗어나 먼 나라에 가서 마냥 자유롭게 무엇이든 다 하며 내가 곧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즐기며 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아담의 후예여서 그렇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제일 먼저 한 게 뭐죠? 하나님의 눈을 피해 멀리 달아나 숨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그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특히 자기가 뭔가 좀 가졌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아버지로부터 자유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둘째 아들처럼 돈이라던가 혹은 젊음이라던가, 남다른 야심이나 재주나 지식이나 건강이나 권력 같은 것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꾸만 아버지의 권위나 간섭으로부터 멀리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언제나 뭐가 있다구요? 하나님 없는 행복, 먼 나라에서 자유를 약속하며 아비 집을 떠나도록 충동질하는 마귀의 미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 품을 떠나보십시오. 아버지 집을 등져보십시오. 어떻게 되는지!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의 모든 비극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도 아버지 집을 떠난 둘째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없는 저 먼 세상에 나가 그야말로 마음껏 자유와 향락을 누렸다는 겁니다. 자기 멋대로, 평소 자기가 동경하고 바라던 대로 신나게 살았다는 거죠. 더 이상 내 삶의 규범이나 통제나 제도가 없어졌는데 못할 짓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허랑방탕의 극치를 달린 겁니다. 요즘도 가출 청소년들 보십시오. 그들의 비행, 탈선, 방탕 범죄는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대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아버지 집을 떠난 인생들의 적나라한 모습이고 또 극명한 현주소라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그의 영혼, 그의 인생은 마귀가 접수합니다. 그리고 갖은 올가미를 다 씌워 나의 모든 것을 도적질합니다. 천하의 더러운 곳, 악한 곳이라는 곳은 다 끌고 다니며 신나게 나의 인생을 유린합니다. 그래서 그를 완전히 파멸시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악의 관계로 몰아갑니다.
본문의 이 둘째 아들도 보십시오. 순식간에 돈을 다 탕진해버렸기 때문에 그 먼 나라에서의 향락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돈을 물 쓰듯 하며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여자들도 많았지만, 돈이 떨어지고 거지 신세가 되자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는 극심한 흉년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농경사회에 흉년이 들면 산업사회의 경제 공황보다 민심이 더 고약해집니다. 그러니 누가 그 이방인 빈털터리를 동정하며 맞아줬겠습니까? 온갖 냉대와 문전박대를 당하며 돌아다니다가 겨우 어느 한 집에 돼지를 치는 알바 자리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이제 그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제일 불결하고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서 절대 먹지도 않지만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탕자는 졸지에 그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돼지 같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흉년 탓이었는지 아니면 주인이 악덕이었는지, 끼니조차도 제대로 때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16절을 보면 그것조차도 여의치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아버지 집을 가출한 인생의 종국입니다.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서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달아나면, 마음껏 살 수 있고, 온 세상이 내 것이고, 무엇이나 다 하며 마냥 행복할 것 같았지만, 보십시오.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냄새나고, 가장 부정한 돼지우리에서 돼지 사료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고 굶는 정말 짐승만도 못하고,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이 탕자는 그 인생의 맨 밑바닥에서 막장에서 영영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아버지 집을 다시 떠올리며 막급한 후회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랍비들의 격언 가운데 쥐엄 열매를 먹어봐야 회개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 말 그대로 탕자는 그 돼지우리에서 비로소 처절하게 회개하는데, 뭐라고 했다구요?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러면서 일어나 이제 돌아가리라 돌아가서 아버지께 앞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며 간청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여러분, 이건 뭘 뜻할까요? 우리는 때로 아버지를 버리고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을 등지고 달아나지만, 아버지는 절대 우리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귀는 나를 끌고 다니며 실컷 부려먹고 유린하고는 결국 파멸의 돼지우리와 시궁창에 던지지만, 세상 친구들은 다 나를 이용하고 쥐어짜듯 내게서 단물을 빨고는 비정하게 나를 차지만, 주님은 여전히 나를 쫓고 계시고 그 어둡고 냄새나고 음습한 돼지우리까지 찾아 오사 부단히 성령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회개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을 결단하도록 용기를 불어넣고 계신다는 겁니다. 내가 돌아가 아버지께 이르기를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집에 품꾼의 하나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받아주소서 하리라.
여러분, 이게 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고, 성령께서 주신 회개고, 성령께서 주신 결단이라는 겁니다. 20절을 보면 실제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그랬습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진정한 회개입니다. 회개란 단순한 반성이 아닙니다.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회한이 아닙니다. 회개란 귀환이요 귀향입니다. 유턴입니다.
만약 본문의 이 탕자가 그 먼 나라 어느 돼지우리에 앉아 그냥 뼈아픈 후회만 하고 뜨거운 눈물만 흘리며 나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무슨 낯으로 내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또 돌아간들 아버지가 나를 다시 받아주시겠는가 하며 귀향하지 않았다면, 그건 절대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가룟 유다도 후회는 했지 않습니까? 내가 무고한 자의 피를 팔고 범죄했다며 주님의 몸값으로 받은 은 삼십을 돌려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대신 자기의 목을 맸습니다. 그래서 그건 회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본문의 이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후회하고 반성하고 뉘우치며 결단합니다. 이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다시 돌아가리라.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귀향길에 나섰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 몰골로 내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가 아니라, 누더기를 걸친 이 모습 그대로, 냄새나고 상처난 몸 그대로 나는 이제 돌아가리라 하며 아버지 집으로 귀향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라는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전에 집으로 전보를 친 것도 아닌데 저 멀리 집 앞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날마다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찬송가 527장의 가사 그대롭니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먼저 보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본 겁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보십니다. 그동안도 아버지의 눈은 한순간도 아들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창녀들과 함께 보낸 그 숱한 밤에도 아버지는 홀로 아들의 그 방탕한 현장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술에 만취해 환락의 거리를 비틀거리며 헤맬 때도 아버지의 눈은 늘 그 아들의 뒤를 쫓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냥 서서 기다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그 냄새 나는 몸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원어에는 아버지가 쉴 새 없이 아들에게 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아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합니다. 21절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귀에는 아들의 그런 말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고생한 아들이 너무 측은하고 안쓰럽고 또 이렇게 돌아와준 게 너무도 기쁘고 고마울 뿐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뭘 추궁하지도 않았습니다.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다 불문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용서와 환대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당장 목욕을 시키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겨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들의 지위를 온전히 복원시켜줬다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반지도 신발도 좋은 옷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종이 되겠다며 귀향했는데 아버지는 그를 여전히 소중한 당신의 아들로 받아주신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종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으라며 지시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객지에서 돼지 사료인 쥐엄 열매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렇듯 이제는 아버지 집에서 넉넉하고도 풍성한 삶을 보장받게 된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4절은 당시 탕자 아버지의 심경을 너무나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여러분, 이게 바로 돌아온 아들을 맞은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이게 바로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입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요.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그런데 이게 그대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의 주님의 심정이고 감격이고 기쁨이라는 겁니다. 죄인 하나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으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 명절 때 자식들이 부모님을 찾아가 뵈면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효도는커녕 늘 심려만 끼치는 자식인데도 찾아가 뵈면 그렇게도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부모님의 그 자식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또 나를 위하시는 그 지극한 마음을 깊이 체험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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