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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4] 진리가 너희를 해방하리라! (요 8: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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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 기도문>

 

주님,

주일 아침 온라인 예배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희 민족의 광복 77주년을 감사하는 기념주일이오니 예배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사 신령과 진정으로 산제사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일제의 압제 아래 있던 저희 민족에게 기적 같은 해방을 주사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게 하신 지가 벌써 80년이 다 돼 가지만 저희는 아직도 여러 면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부디 이 땅에 참된 평화와 화해와 통일을 허락하시고, 저희의 심령도 더 이상 비굴한 종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기에 합당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돌아보사 안수해 주시고, 수해로 고통을 겪거나 슬픔을 당한 이웃들을 위로하시며, 저희 가정도 온 가족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늘 주 안에서 강건하게 하시고, <코로나19>로부터도 안전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상고할 때 큰 깨달음을 주시고, 진리 안에서 주님과의 뜨거운 교감을 이루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20814

요 8:32-34

진리가 너희를 해방하리라!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내일이 광복 77주년이고 오늘은 그 기념주일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에게도 광복절이 있죠.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36년간 식민지 생활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집트 애굽에서 무려 40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념하며 지키는 유월절이 이를테면 유대인들의 광복절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유월절은 무슨 뜻입니까? 넘어간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영어로는 유월절을 passover라고 합니다. 히브리말로는 페샤, 헬라말로는 파스카, 다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뭘 넘어가요?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와 문인방에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유대인들의 집은 그냥 넘어가고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들어가서 그 집에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였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맨 마지막 장자 재앙 아니었습니까. 끝까지 버티던 애굽 왕 바로가 결국은 그 마지막 재앙에 굴복해서 유대인들의 출애굽을 허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유월절로 명명하며 오늘날까지도 가장 성대한 절기, 가장 큰 민족의 축제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려 40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그렇게 애굽에서 해방되어 기적같이 자유를 되찾았는데, 비록 40년 동안 고된 광야 생활을 했을망정 해방 이후, 광복 이후에는 그들이 다 자유인답게 당당하게 살았습니까?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민족답게 책임적 주체로 살았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망령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노예로 살던 애굽을 그리워하며 애굽의 추억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옛 노예 생활로 돌아가자며 작당하고 남을 선동하기까지 했습니다. 툭하면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마늘과 부추, 미나리 타령을 하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보십시오. 몸은 분명 애굽에서 해방이 됐는데도, 신분은 이제 분명 자유인인데도, 그들의 의식이나 정서나 기호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하기야 400년간이나 그 땅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그 모든 게 하루아침에 다 청산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그 후에도 다시 70년간 바벨론에 잡혀가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과거 애굽에서의 종살이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우리 민족의 일제 36년에 비하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때도 참 많은 걸 잃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무슨 언어를 쓰셨을까요? 당연히 유대인들의 고유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쓰셨을까요? 아니면 요즘 영어처럼 당시로서는 가장 세계화됐던 헬라어, 그리스말을 쓰셨을까요? 


아닙니다. 실제로는 아람어라는 바벨론 말을 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이미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 지 500년도 더 된 시점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유대 서민들은 여전히 자기 나라말을 못 쓰고 옛 바벨론말인 아람어를 쓰고 있었던 겁니다. 애굽으로부터 400년 만에 또 바벨론으로부터 70년 만에 해방이 되어 이제는 자유인이 됐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옛 식민지 문화를 붙잡고 살았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도 자유를 주셨다고 했고, 5장 13절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주님의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자유하십니까? 더 이상 그 어떤 곳의 노예도 종도 아니십니까? 

 

우리는 분명 주님에 의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들인데, 정말 그 이름과 신분에 걸맞게 진정으로 죄에 대해 자유하냐는 겁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이라면 더 이상 죄에 붙잡혀 살면 안 되잖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더는 죄를 안 짓고 사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사십니까?

사실은 바울도 이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좌절하며 힘들어 했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7장 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로마서 7장 22절 이하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리고 드디어 비명을 지릅니다. 로마서 7장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보다 더 위대한 성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쓴 때가 주후 57년경입니다. 그렇다면 주후 40년경에 회심을 했으니까, 죄에서 해방되고 주님의 사도가 된 지 벌써 20년이 다 돼가는 시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신음하며 이렇게 비명까지 지르고 있습니다. 


구원파에서는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아직도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구원받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구원, 완전한 중생을 얻게 해주겠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해주겠다며 자기들에게로 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 문제가 마음에 걸리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는데, 그 쪽에서 그렇게 명쾌하게 말하니까,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 교묘한 미끼를 덥석 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도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 올무에 걸리게 돼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사람인데도 피할 수 없이 다시 죄를 범하게 되는 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여러 차례 여러분께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일단 그것도 분명 죄는 죄지만 그럼에도 전에 죄의 종으로 살면서 짓던 죄와는 그 성격이 구분된다고 했죠. 전에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며 짓던 죄는 그야말로 마귀가 사탄이 시켜서 지은 죄였지만, 지금 예수를 믿으면서 짓는 죄는 마귀가 시켜서 짓는 죄라기보다는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잔재, 옛 생활의 습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짓는 죄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며 탄식했던 바로 그런 죄를 우리가 지금 계속 지으며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질이나 그 죄의 성격이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듭나서 새로워졌다는 것, 이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됐다는 것은 곧 우리의 신분이나 우리의 소속, 우리의 법적인 지위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의 정서나 근성이나 기호까지도 다 그렇게 새로워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몸에 밴 옛사람의 습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죄를 밥 먹듯 지으며 살던 옛 삶의 탄력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죄의 독성, 죄의 니코틴이 아직 우리 몸에 배어있어서 그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주 옛 가락이 나오는 겁니다. 그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렇고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도, 성자도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니까 그냥 그렇게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곧 진리가 너희를 그런 갈등으로부터, 그런 모순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말씀인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바울을 보십시오. 기독교를 박해하다 극적으로 회심을 하고 주님의 사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짓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너무 실망하고 좌절한 나머지 로마서 7장 마지막절까지도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데, 놀랍게도 로마서 8장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이하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이 이 놀라운 진리를 비로소 여기서 깨달은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죄를 안 짓는다가 아니라, 죄는 짓되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정죄함을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를 정죄하고 단죄하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우리가 오직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의 저촉만을 받게 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를 단죄하던 법이 해소됐기 때문에, 막말로 이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의 그 행위를 정죄할 수단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저게 틀림없이 못된 짓이고 나쁜 짓인데도 그걸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거나,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네가 해방됐다는 말씀은 다 그런 뜻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애굽 사람들이나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만 보면 크게 다를 게 없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그냥 유월하고 굳이 애굽 사람들의 집에만 들어가 장자를 친 것은 오직 하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그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고,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어린 양의 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삶의 기준이 악하냐 선하냐가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벼락 맞아 죽은 사람이나 벼락을 피해 산 사람이나 도덕적으로는 사실 똑같습니다. 아니 벼락을 피한 사람이 더 악당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벼락을 맞고 또 어떤 사람은 벼락을 안 맞았을까요? 벼락을 맞은 사람은 요즘같이 비 오고 천둥 칠 때, 그냥 바깥에 노출돼 있었고 벼락을 안 맞은 사람은 피뢰침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죄를 지으며 사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정죄를 받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죄함을 안 받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냥 밖에 노출돼 있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고 십자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지, 이 사람은 더 악하고 저 사람은 더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차피 죄는 다 짖습니다. 본의 아니게 짖든 고의로 짖든 믿는 사람도 세상 사람들도 다 날마다 죄 지으며 삽니다. 그럼에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벼락이 없는 이유는 십자가라 이름하는 피뢰침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은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토록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바울도 바로 이 진리를 깨닫고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하며 힘찬 개가를 불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더 이상 정죄하리오. 

 

부디 광복절을 맞아 다시 한 번 성경이 말씀하는 보다 근원적이고도 영적인 의미의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깊이 되새기시면서 늘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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