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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20807] 아브라함의 품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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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div><a href="http://thegreen.or.kr/./files/attach/images/59/655/060/a2a72adc9e21a76c96cb2e0fe140904f.jpg" class="image-placeholder">0807.jpg</a>
<!-- paragraph:p0002 -->
<p> </p>
</div>

<!-- paragraph:p0003 -->
<div> </div>

<!-- paragraph:p0004 -->
<div><span>&lt;온라인 예배 기도문&gt;</span></div>

<!-- paragraph:p0005 -->
<div> </div>

<!-- paragraph:p0006 -->
<div><span>주님,</span></div>

<!-- paragraph:p0007 -->
<div><span>8월 첫주일 아침 온라인 예배로 주님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희 가정이 드리는 이 조촐한 비대면 예배가 신령과 진정을 다하는 산제사가 되도록 예배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해 주시옵소서.</span></div>

<!-- paragraph:p0008 -->
<div> </div>

<!-- paragraph:p0009 -->
<div><span>저희 교회를 도우사 그동안 큰 짐이 되었던 은행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 이제 저희 사정에 맞게 온라인 체계로 전환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span></div>

<!-- paragraph:p0010 -->
<div><span>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내년부터는 또 다른 길을 가게 하신 주님의 뜻도 저희로 하여금 깊이 헤아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span></div>

<!-- paragraph:p0011 -->
<div><span>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을 이룰 것이라는 큰 확신과 담대함도 허락해 주시옵소서.</span></div>

<!-- paragraph:p0012 -->
<div> </div>

<!-- paragraph:p0013 -->
<div><span>주님,</span></div>

<!-- paragraph:p0014 -->
<div><span>폭염으로부터 &lt;코로나19&gt;로부터 저희 가정을 지키시고, 늘 가족들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span></div>

<!-- paragraph:p0015 -->
<div><span>환자들을 안수하사 하루 속히 온전케 하시고, 저희 가정 온 가족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주 안에서 늘 강건하게 하시옵소서.</span></div>

<!-- paragraph:p0016 -->
<div> </div>

<!-- paragraph:p0017 -->
<div><span>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위로와 하늘의 신령한 소망을 체험하고 느끼게 해주시옵소서.</span></div>

<!-- paragraph:p0018 -->
<div> </div>

<!-- paragraph:p0019 -->
<div><span>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span></div>

<!-- paragraph:p0020 -->
<div> </div>

<!-- paragraph:p0021 -->
<div> </div>

<!-- paragraph:p0022 -->
<div> </div>

<!-- paragraph:p0023 -->
<p> </p>

<!-- paragraph:p0024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FamY2nymdLU" title="미디어 원본"></a></span>

<!-- paragraph:p0025 -->
<p> </p>

<!-- paragraph:p0026 -->
<p> </p>

 

<!-- paragraph:p0027 -->
<p> </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20220807</span></p>

<!-- paragraph:p0029 -->
<p class="p1"><span>눅 16:19-31</span></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아브라함의 품</span></p>

<!-- paragraph:p0031 -->
<p class="p2"> </p>

<!-- paragraph:p0032 -->
<p class="p1"><span>19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span></p>

<!-- paragraph:p0033 -->
<p class="p1"><span>20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span></p>

<!-- paragraph:p0034 -->
<p class="p1"><span>21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span></p>

<!-- paragraph:p0035 -->
<p class="p1"><span>22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span></p>

<!-- paragraph:p0036 -->
<p class="p1"><span>23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span></p>

<!-- paragraph:p0037 -->
<p class="p1"><span>24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span></p>

<!-- paragraph:p0038 -->
<p class="p1"><span>25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span></p>

<!-- paragraph:p0039 -->
<p class="p1"><span>26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span></p>

<!-- paragraph:p0040 -->
<p class="p1"><span>27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span></p>

<!-- paragraph:p0041 -->
<p class="p1"><span>28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span></p>

<!-- paragraph:p0042 -->
<p class="p1"><span>29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span></p>

<!-- paragraph:p0043 -->
<p class="p1"><span>30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span></p>

<!-- paragraph:p0044 -->
<p class="p1"><span>31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span></p>

<!-- paragraph:p0045 -->
<p class="p2"> </p>

<!-- paragraph:p0046 -->
<p class="p2"> </p>

<!-- paragraph:p0047 -->
<p class="p1"><span>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단지 서로 시차가 좀 난다는 것뿐인데 그 시차조차도 반드시 나이순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때로 젊은 사람이 먼저 죽을 수도 있고, 또 나이 든 사람이 더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이나 사후 세계를 얘기하면 누구나 참 불편해하고 거북해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span></p>

<!-- paragraph:p0048 -->
<p class="p2"> </p>

<!-- paragraph:p0049 -->
<p class="p1"><span>그런 화제가 한마디로 우리의 삶의 흥을 깬다는 겁니다.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을 간다는데도 죽음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얘기는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0 -->
<p class="p2"> </p>

<!-- paragraph:p0051 -->
<p class="p1"><span>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은 또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교회는 드나들지만 믿음은 또 어떤지, 다른 사람들의 평가 이전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화제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겁니다. 그게 소망이나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이나 부담으로 작용하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2 -->
<p class="p2"> </p>

<!-- paragraph:p0053 -->
<p class="p1"><span>그러나 여러분, 우리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언제나 천국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적인 목적지가 요단강 건너 가나안이었듯이 우리의 최후 목적지도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서 들어가는 천국입니다.</span></p>

<!-- paragraph:p0054 -->
<p class="p2"> </p>

<!-- paragraph:p0055 -->
<p class="p1"><span>여러분, 우리는 절대 교양이나 무슨 현대인의 문화생활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돈 잘 벌고 자식들 다 잘되라고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 가기 위해섭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 믿고 기도하는 겁니다.</span></p>

<!-- paragraph:p0056 -->
<p class="p2"> </p>

<!-- paragraph:p0057 -->
<p class="p1"><span>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그는 늘 자주색으로 염색한 최고급 겉옷에다 속에는 고운 극세사 베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벌이며 아주 호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무대에는 그 부자뿐 아니라 딱하기 그지없는 병든 거지 한 사람도 등장합니다. 사실은 이 거지가 바로 이 희곡, 이 시나리오의 주인공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8 -->
<p class="p2"> </p>

<!-- paragraph:p0059 -->
<p class="p1"><span>몸은 온통 피부병으로 말이 아니었고, 그 부잣집 대문 앞에 그냥 널부러져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중증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부잣집에서 그 병든 거지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오직 개들뿐이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개들이 와서 그 거지의 헌 데를 핥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자의 그 호화스러운 삶도 또 병든 그 거지의 비참하고 구차한 삶도 결코 영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0 -->
<p class="p2"> </p>

<!-- paragraph:p0061 -->
<p class="p1"><span>어느 날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22절을 보면,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거지에 대해서는 그냥 죽었다는 말뿐 장사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병든 거지에다 남의 대문간에서 객사한 사람인데 무슨 장례가 있었겠습니까. 그냥 거적에 싸서 저 성 밖 쓰레기 소각장인 힌놈의 골짜기에 내다 버렸을 겁니다. 무연고 변사자니까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겠습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2 -->
<p class="p2"> </p>

<!-- paragraph:p0063 -->
<p class="p1"><span>어쨌든 여기까지가 연극으로 치면 제1막입니다. 이 세상을 무대로 부자와 거지의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그린 겁니다. 그런데 연극의 제2막은 무대가 이 세상이 아니고 저 세상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더 극적인 것은 그 두 사람이 죽어서 그들의 영혼이 각각 그들의 육신을 떠나는 순간 도저히 믿기 어려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처지와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4 -->
<p class="p2"> </p>

<!-- paragraph:p0065 -->
<p class="p1"><span>거지는 곁에 아무도 없이 비참하게 쓸쓸하게 고독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천사들이 와서 그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몇날 며칠 애도하고 수입 대리석으로 호화 분묘를 조성하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른 부자는 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저승사자들이 찾아와서 그의 영혼을 음부로 끌고 갑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6 -->
<p class="p2"> </p>

<!-- paragraph:p0067 -->
<p class="p1"><span>오늘 본문은 마치 가려진 베일을 찢듯이 무덤 저편의 세계를 우리에게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여기 거지가 천사들의 안내로 갔다는 아브라함의 품이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천국 혹은 낙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면에 부자가 간 음부란 원어로 하데스라는 곳인데, 하데스는 악인들과 불신자들이 가는 지옥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 하데스라는 말과 비슷한 개념인 게헨나 라는 말도 자주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데스는 음부, 게헨나는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8 -->
<p class="p2"> </p>

<!-- paragraph:p0069 -->
<p class="p1"><span>보십시오. 죽음이란 절대 끝이 아니잖아요.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그러나 그건 정말 치명적인 선택입니다. 그곳이 아브라함의 품, 곧 천국이든, 불타는 하데스, 곧 지옥이든,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고 영원한 사후 세계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 엄숙한 사실에 바로 죽음의 심각성이 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0 -->
<p class="p2"> </p>

<!-- paragraph:p0071 -->
<p class="p1"><span>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죽어 봤냐구요? 저도 직접 죽어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사후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는 중요한 정신 현상이 바로 꿈 아닙니까.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는 꿈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꾼 꿈의 내용을 해석해서 그 사람의 정신과 심리와 잠재의식을 분석합니다. 그래서 1899년에는 유명한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내죠.</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2 -->
<p class="p2"> </p>

<!-- paragraph:p0073 -->
<p class="p1"><span>그런데 같은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은 꿈의 내용보다는 꿈이라는 정신 현상, 꿈이라는 잠재의식의 활동 자체가 가리키는 형이상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꿈이란 곧 사후세계에 대한 깊은 종교적 암시라는 겁니다. 실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잠자는 사람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그냥 곯아 떨어져서 세상 모르고 잠만 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정작 가만히 누워 잠자고 있는 그 사람은 꿈속에서 이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신비하고 오묘한 세계를 다 헤매고 다닙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고향집에도 가고, 이미 옛날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만나고, 하룻밤에 천리도 가고 만리도 가면서 시간 여행을 합니다. 그럼에도 깨어 있는 사람들은 지금 자고 있는 그 사람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고 있다고만 생각하지 그 사람이 지금 꿈속에서 미국을 가고 있는지 독일을 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도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4 -->
<p class="p2"> </p>

<!-- paragraph:p0075 -->
<p class="p1"><span>우리는 이제 죽었으니까 이 사람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화장도 하고 매장도 하며 장례를 치르지만,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의 시신만을 그렇게 처리하는 것일 뿐 그 사람의 영혼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영혼은 그때부터 마치 꿈속 세계처럼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든가 아니면 저승사자에게 이끌려서 하데스라는 음부로 가든가 해서 전혀 새로운 내생을 시작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도 제3의 자리는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연옥은 없습니다. 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아브라함의 품 아니면 하데스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6 -->
<p class="p2"> </p>

<!-- paragraph:p0077 -->
<p class="p1"><span>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두 사람, 부자와 거지는 어째서 그들의 사후 운명이 각각 하데스와 아브라함의 품으로 결정이 됐느냐 하는 겁니다. 부자는 어째서 지옥으로 가고 거지는 어째서 천국으로 가게 됐느냐는 거죠. 거지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든 노숙자로 살았기 때문에 천국을 가고, 부자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에 죽어서는 하데스, 곧 지옥을 간 겁니까? 절대 그런 법은 없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8 -->
<p class="p2"> </p>

<!-- paragraph:p0079 -->
<p class="p1"><span>우선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왜 천국을 갔을까요?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을까요? 절대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을 간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한번 보십시오.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거지 주제에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80 -->
<p class="p2"> </p>

<!-- paragraph:p0081 -->
<p class="p1"><span>나사로 라고 하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신다 혹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그대로 이 병든 거지의 신앙적인 혹은 영적인 정체성을 뜻한다고 봐야 옳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82 -->
<p class="p2"> </p>

<!-- paragraph:p0083 -->
<p class="p1"><span>오늘 이 말씀은 실화가 아니고 주님의 창작이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캐릭터를 설정하시고 이름을 붙이실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암시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작명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이 그 숱한 이름 가운데서 굳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이셨을 때는 거지 나사로야말로 인간적으로만 보면 가장 고단하고 불행한 인생이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았던 누구보다도 복된 인생이었다는 거죠. 그 사실을 말씀하고 싶으셔서 그렇게 작명하시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 거짓 나사로야말로 이 땅에서는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었던 가난한 병자였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며 살았던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간 겁니다.</span></p>

<!-- paragraph:p0084 -->
<p class="p2"> </p>

<!-- paragraph:p0085 -->
<p class="p1"><span>그렇다면 부자는 왜 하데스 음부에 떨어졌을까요? 물론 부자도 생전에 부요하게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을 간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그가 무슨 부정 축재를 했다거나 뇌물을 받고 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져 처절한 고통을 당합니다. 제발 물 한 방울만 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처지가 생전의 거짓 나사로보다도 훨씬 더 딱하고 비참해 보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86 -->
<p class="p2"> </p>

<!-- paragraph:p0087 -->
<p class="p1"><span>그렇다면 부자의 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본문 27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와 아브라함 간의 대화에서 그가 하데스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합니까. 자기는 비록 이곳에 와 있을지라도 세상에는 아직도 자기의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만큼은 절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이곳 사후 세계를 좀 증언하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span></p>

<!-- paragraph:p0088 -->
<p class="p2"> </p>

<!-- paragraph:p0089 -->
<p class="p1"><span>그 말에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럽니다. 무슨 뜻이죠? 세상에는 모세오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이루어진 성경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0 -->
<p class="p2"> </p>

<!-- paragraph:p0091 -->
<p class="p1"><span>여기서 우리는 그 부자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부자 역시도 그의 다른 형제들처럼 생전에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그가 평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듣고 믿었다면, 대문간에 거지 나사로를 그렇게까지 그냥 방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에 오직 자신을 믿으며 살았고 또 그 많은 부로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사는 대신 오직 자신의 영화만을 위해 살았을 뿐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2 -->
<p class="p2"> </p>

<!-- paragraph:p0093 -->
<p class="p1"><span>또 30절을 보면, 부자가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고 말하는데 이 발언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 부자도 다른 형제들처럼 그간 아무런 회개도 없이 살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천만하고 치명적인 것인가를 알게 됐다는 것인데, 그러나 자기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거죠. 그래서 아직 살아있는 형제들만이라도 절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그들을 좀 회개시켜달라고 간언한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4 -->
<p class="p2"> </p>

<!-- paragraph:p0095 -->
<p class="p1"><span>그런데 부자의 그런 호소에 대해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했죠? 참 리얼합니다. 31절을 보면,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 구원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사후 세계를 증언한다고 해도 안 믿는다는 거예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6 -->
<p class="p2"> </p>

<!-- paragraph:p0097 -->
<p class="p1"><span>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기적도 표적도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거지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죠. 누굽니까? 예수님의 친구이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저 베다니의 나사로 아닙니까.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났을 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죠? 다 항복하고 예수를 믿었습니까? 믿기는커녕 주님은 물론이고 다시 살아난 그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음에도 믿기는커녕 주님을 오히려 더 심하게 대적하지 않았습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8 -->
<p class="p2"> </p>

<!-- paragraph:p0099 -->
<p class="p1"><span>그러면 부자가 간 하데스를 한 번 보겠습니다. 하데스란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인데, 그곳이 끔찍한 이유는 불에 타서 죽거나 소멸되지는 않으면서 불에 타는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물 한 방울을 청하는 그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갈 수도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사후의 운명은 더 이상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데스와 나사로 사이에는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깊은 구렁이나 계곡이 있다는 말은 부자나 나사로의 사후 운명이 더 이상은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상태로 고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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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 </p>

<!-- paragraph:p0101 -->
<p class="p1"><span>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순간 그 운명이 영원히 고착됩니다. 가능성이나 그 어떤 기회란 오직 살아있을 때만 해당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믿고 살아있을 때, 회개하고 살아있을 때, 사랑해야 합니다. 죽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더는 할 수 없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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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103 -->
<p class="p1"><span>부자를 보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자기 형제들을 회개시켜 달라고 한 걸 보면, 늦게나마 나름 회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또 살아있는 형제들만큼은 절대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탄원한 걸 보면, 구원의 소중함, 전도의 필요성 같은 것도 깊이 인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가 늦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도 살아있을 때 해야 응답이 됩니다. 보십시오. 부자가 하데스 불꽃 가운데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며 절절히 호소하지만 그게 하나도 안 먹힙니다. 안 통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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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여러분, 오늘 이 부자의 참혹한 비극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가장 큰 깨달음이 뭘까요? 누구나 아직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하고, 한 번이라도 더 자선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믿으면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가장 진지하게 성실하게 책임적으로 관리하는 게 옳다는 겁니다. 복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결국은 훗날 하데스가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복된 인생이라는 겁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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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107 -->
<p class="p1"><span>부디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부담이 아니라 진정한 소망과 기쁨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