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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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4
마 6: 25-34
염려하지 말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6)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늘 많은 염려와 걱정에 짓눌려서 살죠. 과장이 아니라 엄살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환경이 그렇고 또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내일이 그렇습니다. 그저 모든 게 위태롭고 아무것도 보장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늘 걱정이죠. 늘 염려입니다. 늘 매사가 불안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만 해도 걱정 없으신 분 있습니까? 염려 없으신 분들 있습니까? 주일 아침에 예배드린다고 이렇게 나와 앉아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온갖 염려와 걱정에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루도, 한순간도 염려와 걱정 없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오늘 본문에는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한들 누가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주님이 먹이시고 입히지 않느냐. 따라서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 그러니 내일 일을 오늘 앞당겨서 염려하지 말아라.
단순하게 이 말씀을 들으면 참 위로가 되죠. 힘이 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딪히면 어떻습니까. 금방 회의에 빠지게 되고 또 많은 의문이 고개를 듭니다. 어떻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 없이 살기 위해서는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의 여러 가지 모순이나 부조리가 없어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이 염려와 걱정을 사회적인 혹은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조리의 문제로 보시지 않고 철저하게 믿음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믿음의 문제로 접근하셨습니다. 절대 이 사실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에게는 염려가 없죠. 왜 그럴까요? 어린아이들은 왜 걱정을 안 할까요? 사회적인 부조리와 현실적인 모순이 없어서가 아니라, 철이 없고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자기 엄마와 아빠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벼락이 쳐도, 전쟁이 터져도, 아니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들 곁에 있는 엄마 아빠가 자기들을 지키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다 수습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걱정은 자기들 몫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다 부모의 몫이다. 그래서 불이 나서 대피소 생활을 해도, 전쟁이 터져서 피난길에 올라도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치면서 놀죠. 걱정이 없어요. 염려를 안 합니다. 그건 자기들 몫이 아니니까요. 엄마 아빠가 다 해결할 거니까요. 엄마 아빠를 철석같이 믿는 겁니다. 자기들 할 일은 그냥 깔깔거리면서 장난치며 노는 거예요. 만약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데도 어린아이가 먹을 걸 걱정하고, 입을 걸 걱정한다면 그게 정상적인 아이일까요.
따라서 주님은 염려를 철저하게 믿음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주님은 염려를 불신앙의 소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작아서 걱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다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나를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랴 하는 믿음이 없어서 혹은 그런 믿음이 미약해서 결국은 염려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염려는 다른 모든 문제 이전에 믿음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럼 이번에는 염려를 믿음의 문제로 규정하신 주님의 처방을 한번 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살아야 과연 그 불신앙적인 염려를 극복하고 정말 우리도 어린아이들이 그 부모를 믿고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내 삶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해야 비로소 모든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절 이하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이 왜 여기서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을까요. 그들의 뭘 보라는 겁니까. 새나 백합의 아름다움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농사도 안 짓고 베도 안 짜지만 굶지 않고 헐벗지도 않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그들의 탁월한 재주를 보라는 게 아닙니다. 새와 백합화의 존재의 근거, 생존의 원천을 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새나 백합이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염려도 걱정도 하지 않지만, 밤낮 염려하고 걱정하며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건강하고 밝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그들의 능력이나 그들의 자질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며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라는 거예요. 그들의 그 존재의 근거, 생존의 기반을 보라는 겁니다.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 공중에 새 한 마리, 저들의 아름다운 풀 한 포기도 그게 다 제 힘으로, 제 재주로, 제 능력으로 늘 저렇게 싱싱하게 건강하게 아름답게 조화롭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을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돌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그렇게 공들여 가꾸시며 입히시는 분이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저 많은 참새보다 천 배 만 배 더 귀하다고 하셨는데 오죽 더 잘 돌보시겠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아버지가 계신데 뭘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십니까. 오늘도 우리가 죽도록 염려한다는 것은, 곧 내 인생을 내가 내 힘으로 하나님을 배제하고 내 능력으로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여기서 굳이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겁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렸죠. 절대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기서 굳이 보라고 하신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라구요? 그냥 창조주, 조물주, 자연물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창조주입니다. 조물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입니까?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공중에 새나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께 그냥 피조물의 하나죠. 그저 자연물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하나님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아들 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한데,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값지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십시오.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염려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역시 삶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본문 31절 이하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사실 우리의 모든 염려는 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이 의식주 문제에서 오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염려는 대부분이 의식주 문제를 내 삶의 최우선순위로, 최우선 과제로 삼는 데서 발생한다는 게 주님의 지적입니다.
여러분, 의식주 문제가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라는 게 지극히 당연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죠. 우리는 본래 의식주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데, 그럴 때 비로소 이 모든 것, 즉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더 하시겠다고 보장하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셨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의식주가 우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우리 삶의 제 1순위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나 깨나 염려뿐입니다. 올해도 앞으로도 의식주가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인 한, 정말 죽을 때까지도 절대 이 염려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3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의식주를 자기 삶의 최고의 목표,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사는 것은 다 이방인들의 삶의 철학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실상이라는 거예요. 불신자들, 세상 사람들의 삶의 행태라는 겁니다. 의식주를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사는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며 사는 이방인들처럼, 불신자들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삶의 철학, 삶의 우선순위를 재고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굳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에게 더하시겠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평생 먹고 마시는 문제와 씨름하며 염려하고 고통하며 살다 죽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맞습니다. 솔직히 그들이야 잘 먹고 잘 살고 뭐 잘 입는 것 외에 뭐가 더 있겠습니까.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결국은 다 그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먼접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내 삶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비로소 우리가 염려로부터, 걱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게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하루 단위로 살라는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우리 잘 하는 그런 노래 있잖아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라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안한 맘 주옵소서.” 원래는 우리가 다 하루 단위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원초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라. 생각해 보십시오. 새나 들꽃은 오직 일용할 양식으로 살잖아요. 새에게는 곳간이 없습니다. 오직 그날그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살 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도 그랬습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만나로 살았잖아요. 그날그날 주시는 메추라기 고기로 살았잖아요.
그러나 요즘 우리는 절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탐욕의 화신들입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염려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게 염려의 기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정말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염려합니까? 아니잖아요. 항상 더 가지지 못해서 안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감사합시다. 3세기 초대교회 문서들을 보면 티테이오스라는 말이 나옵니다. 티테이오스 바나바, 티테이오스 루카스, 티테이오스 마태우스, 티테이오스 요하네스, 티테이오스 파울루스 등 이 티테이오스라고 하는 호칭이 많이 나오는데, 티테오스라고 하는 말은 염려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말로 염려하지 않는 자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 말이 곧 믿는 자의 고유한 칭호로 쓰였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자, 걱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여러분 이름 앞에도 다 티테이오스를 붙이십시오. 티테이오스 조성노, 티테이오스 이재화, 티테이오스, 염려하지 않는 자입니다.
특히 요즘 우리는 의식주보다 교회 문제 때문에 내일을 걱정하고 또 내년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안 계십니까? 고아이십니까? 그런 건 다 아버지의 몫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저 연말까지 계속되는 온라인 예배에 충실하시며 마지막 피날레를 가장 아름답게, 가장 멋지게, 가장 충실하게 장식하시면,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우리 모두를 가장 복된 길로, 가장 풍성한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어련히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시고 안도하며 감사하며 생활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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