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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20710] 여호와 이레 (창 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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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span>20220710</span></p>
<!-- paragraph:p0002 -->
<p class="p1"><span>창 22:7-14</span></p>
<!-- paragraph:p0003 -->
<p class="p1"><span>여호와 이레</span></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3"><span>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span><br><span>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span><br><span>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span><br><span>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span><br><span>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span><br><span>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span><br><span>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span><br><span>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span></p>
<!-- paragraph:p0006 -->
<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2"><br></p>
<!-- paragraph:p0008 -->
<p class="p1"><span>이삭이 자신을 불태울 나뭇가지를 등에 지고 온통 바위로 뒤덮인 모리아 산을 오르다가 뭔가 좀 이상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린 양 대신 너를 잡아 바칠 거라는 말은 못하잖아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2"><br></p>
<!-- paragraph:p0010 -->
<p class="p1"><span>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참 명답인데, 바로 여기 하나님이 준비하심,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심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오자성어로로 뭐라구요?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정말 아브라함의 그 확신처럼 하나님이 이미 거기에 수풀에 뿔이 걸린 그래서 오도가도 못하는 양 한 마리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이삭 대신, 자기 외아들 대신 그 숫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잖아요. 실로 여호와 이레의 가장 원초적인 사례입니다.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span></p>
<!-- paragraph:p0011 -->
<p class="p2"><br></p>
<!-- paragraph:p0012 -->
<p class="p1"><span>그런데 사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오늘 이 사건뿐 아니라 언제나 여호와 이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소중한 전환점, 분기점은 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로 다 결정이 됐습니다. 한번 보십시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3 -->
<p class="p2"><br></p>
<!-- paragraph:p0014 -->
<p class="p1"><span>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럼에도 아무런 대책도 목적지도 없이 무조건 떠나고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이라는 목표, 최종적인 목적지를 정해놓고 준비해 놓고 계셨더라는 거죠. 백세가 되고 아내 사라가 구십 세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이삭이라는 그의 독자를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걸로 그냥 인생 끝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이삭을 예비해 두셨더라는 거죠. 이처럼 여호와 이레란 내 인생, 내 삶의 모든 필요와 간절한 소망들을 하나님이 친히 최적으로, 최상으로 다 준비하시고 예비해 놓고 계신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은혜고 또 가장 필요한 축복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모든 게 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서 불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또 회의감과 좌절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 우리에게 여호와 이레에 확신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또 안도하게 될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5 -->
<p class="p2"><br></p>
<!-- paragraph:p0016 -->
<p class="p1"><span>여러분, 아브라함은 어째서 그의 생애 고비 때마다 이런 여호와 이래의 축복을 누리게 됐을까요? 매사를 여호와께서 미리 준비하신다는 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일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7 -->
<p class="p2"><br></p>
<!-- paragraph:p0018 -->
<p class="p1"><span>우선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보장된 은혜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았던 본토가 어디죠? 갈대아 지방인 우르 아닙니까.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 지금 이라크의 남부 지방 그 일대입니다. 오늘날도 우르라는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span></p>
<!-- paragraph:p0019 -->
<p class="p2"><br></p>
<!-- paragraph:p0020 -->
<p class="p1"><span>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옛날 그 우르에서 살 때 누구를 믿었을까요?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신을 믿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비와 종족들은 다 당시 갈대아 사람들이 믿던 달의 신 오르를 믿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곳에서 불러내셨을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1 -->
<p class="p2"><br></p>
<!-- paragraph:p0022 -->
<p class="p1"><span>우선 여호수아서 24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며 다른 신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오랜 전승에도 보면, 당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르에서 우상 제조업을 했다고 합니다. 우상을 제작해서 팔았다는 거예요. 그게 직업이었다는 거죠. 사실 우르라고 하는 지명도 그들이 섬기던 달의 신 오르에서 왔습니다. 오르를 섬긴다고 해서 그 지방 일대가 우르가 된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거기서 그 오르라는 우상을 제작해서 팔던 장인이었다는 겁니다.</span></p>
<!-- paragraph:p0023 -->
<p class="p2"><br></p>
<!-- paragraph:p0024 -->
<p class="p1"><span>그러니까 당연히 오르를 섬겼겠죠. 그 우상을 섬겼겠죠. 그럼 아브라함은요? 아브라함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그의 종족이 섬기던 달의 신 오르를 믿었죠. 우상을 섬겼죠. 하나님을 몰랐어요. 아니 가업이 우상 제조업인데 누굴 믿었겠습니까. 더구나 철저한 가부장 시대, 종족 시대에 아들이 아버지의 종교나 족장의 신앙과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종교를 갖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때는 왕의 종교가 곧 백성의 종교를 결정했습니다. 족장의 종교가 곧 그 종족의 종교를 결정했습니다. 가장의 종교가 곧 그 가족 성원들의 종교를 결정하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그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 아버지와 조상들이 섬기던 이방신, 달의 신 오르를 섬기며 살았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5 -->
<p class="p2"><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span>그런데 어느 날 낯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우상을 숭배했지만 아브라함은 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똑같이 그들처럼 우상을 섬겼는데도 하나님이 콕 찍어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사 너는 여기서 떠나라 하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7 -->
<p class="p2"><br></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낯선 신의 그 황당한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죠?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본토를 떠나 앞으로 나아갔으면” 말이 그렇지 이게 쉬운 일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00년도 더 되는 고대 종족 시대입니다. 그때는 자기의 본토를 떠나고, 자기의 종족들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입니다.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것을 뜻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9 -->
<p class="p2"><br></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그럼에도 그는 뜬금없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서 실제 아비 집을, 그 본토를 떠났다는 거예요. 이삭을 바친 사건인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정말 이 얘기만큼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사건도 없잖아요. 번제가 어떤 제사인지 아시죠? 먼저 짐승의 목을 따니다. 그래서 피를 다 뽑아냅니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다음에 짐승의 고기를 부위별로 각을 떠서 차례차례 제단 숯불에 태워서 몽땅 다 바칩니다. 그래서 번제는 그야말로 온전한 헌상, 완벽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1 -->
<p class="p2"><br></p>
<!-- paragraph:p0032 -->
<p class="p1"><span>아니 어떻게 아비에게 제 어린 외아들의 목을 따서 피를 받고 각을 떠서 숯불에 다 태워 바치라고 합니까. 세상에 이런 참혹하고 엽기적인 요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의 그런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추호의 항의도 없이 잡아 바칠 독자 이삭의 등에 그를 불태울 나무를 지우고 묵묵히 지금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3 -->
<p class="p2"><br></p>
<!-- paragraph:p0034 -->
<p class="p1"><span>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순종하고 얼마나 달아날 명분이 많습니까. 아니 무슨 하나님이 피에 목마르고 인육에 굶주린 신입니까. 어떻게 세 사람을 잡아 바치라고 하십니까. 혹은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다시 번제로 잡아 바치라고 합니까. 아니면 도대체 아비에게 제 자식, 제 독자를 잡아 바치라는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든지 항의하고 얼마든지 호소할 수 있잖아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그는 그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주문에 아무런 문제 제기나 탄원 한 마디 없이 무조건 순종합니다.</span></p>
<!-- paragraph:p0035 -->
<p class="p2"><br></p>
<!-- paragraph:p0036 -->
<p class="p1"><span>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네가 나의 말에 순종하였음이니라 그래서 네 씨를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리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절대 거저 주어진 게 아니고 이렇듯 그의 놀라운, 그의 불가사의한 인적인 순종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실수로 누린 축복이 여호와 이레가 아니에요. 순종의 열매, 순종의 결과였습니다.</span></p>
<!-- paragraph:p0037 -->
<p class="p2"><br></p>
<!-- paragraph:p0038 -->
<p class="p1"><span>다음으로 여호와 이레는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보장된 은혜입니다. 오늘 이 사건도 무슨 하나님이 망령이 드셨거나 사람의 피에 굶주린 신이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그를 시험하셨다는 게 이 에피소드의 본질입니다. 핵심입니다. 22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 그러셨다는 거예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9 -->
<p class="p2"><br></p>
<!-- paragraph:p0040 -->
<p class="p1"><span>여러분, 사법고시 100번 보는 것과 오늘 이 시험 한 번 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유사이래 이렇게 난이도가 최악인 시험은 없었습니다. 네 아들, 백세에 얻은 네 사랑하는 독자를 내게 번제로 바쳐라. 각을 떠서 부위별로 다 내게 태워 바쳐라. 세상에 이런 혹독한 고문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1 -->
<p class="p2"><br></p>
<!-- paragraph:p0042 -->
<p class="p1"><span>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구요? 본문 9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내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알겠노라”</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3 -->
<p class="p2"><br></p>
<!-- paragraph:p0044 -->
<p class="p1"><span>그렇게 해서 그 최악의 시험을 통과하자 바로 거기에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이어지는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숫양이 그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6절 이하입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span></p>
<!-- paragraph:p0045 -->
<p class="p2"><br></p>
<!-- paragraph:p0046 -->
<p class="p1"><span>여러분, 시험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진학도 없습니다. 진급도 없습니다. 승진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레의 축복도 없습니다. 힘든 시험, 어려운 시험일수록 영광도 그만큼 큽니다. 지금 우리는 다 큰 시험 앞에 놓였습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외아들을 잡아 바치는 듯한 아픔을 겪고 계시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7 -->
<p class="p2"><br></p>
<!-- paragraph:p0048 -->
<p class="p1"><span>그렇다면 외아들이 뭘까요? 나의 가장 소중한 것, 내 인생에서 이것이 무너지면,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이삭입니다. 우리의 외아들입니다. 건강, 사업, 직장, 남편, 아내, 자식, 교회, 그게 다 우리의 외아들입니다. 우리의 독자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9 -->
<p class="p2"><br></p>
<!-- paragraph:p0050 -->
<p class="p1"><span>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그 하늘 같은 내 외아들을 통해서 나를 시험하십니다. 네 외아들을 바쳐라. 바치되 번제로 바쳐라.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혹독합니까. 얼마나 최악입니까. 왜 그러실까요? 그래야 나의 모든 것, 나의 최후의 진실, 나의 믿음,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나의 본심, 나의 중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활해서 표정 연출을 잘하잖아요. 그런데 외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꼼짝 못합니다.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시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런 시험을 만나면 그걸 이기기보다는 집니다. 판판이 집니다. 절망하고 흔들리고 무너져서 성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하는 예가 훨씬 더 많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1 -->
<p class="p2"><br></p>
<!-- paragraph:p0052 -->
<p class="p1"><span>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의 심장보다 백배 천배 더 소중한 외아들, 눈에 넣어도 절대 아프지 않을 그 백세에 얻은 독자를 제 손으로 잡아 바치는 시험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도 반드시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에 자기의 목을 내댄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3 -->
<p class="p2"><br></p>
<!-- paragraph:p0054 -->
<p class="p1"><span>여러분, 여호와 이레는 결코 우연히 주어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레는 로또가 아닙니다. 혹독한 시험을 이긴 자에게 보장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축복입니다. 시험이란 실패하면 실패한 만큼의 아픔이고 불행이고 비극일 뿐이지만, 이기면 여호와 이레의 무한한 축복을 누립니다. 받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5 -->
<p class="p2"><br></p>
<!-- paragraph:p0056 -->
<p class="p1"><span>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의 이레란 반드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대급부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자기의 소중한 외아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믿음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백세에 얻은 외아들만큼은 절대 안 된다.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이삭만큼은 안 된다. 사실 이게 다 오늘 우리들이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가 늘 실패하는 정확한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항상 실패하고 넘어집니다.</span></p>
<!-- paragraph:p0057 -->
<p class="p2"><br></p>
<!-- paragraph:p0058 -->
<p class="p1"><span>저는 실제 그런 분을 봤습니다. 고3짜리 수험생 아들을 공부하라며 주일인데도 교회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전도사한테는 지옥을 가도 좋으니까 우리 아이 무조건 서울대만 합격시켜달라는 거예요. 정말 그런 사람 봤습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과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실은 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우리 수준이 다 그렇다는 거예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9 -->
<p class="p2"><br></p>
<!-- paragraph:p0060 -->
<p class="p1"><span>왜 그럴까요? 우리가 왜 이 모양일까요? 우리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이 절대가 아니고 내 외아들이 절대여서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외아들을 신봉하기 위해, 외아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 삶에 하나님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내 외아들을 지키겠다. 이게 지금 우리 신앙의 본질일지도 몰라요.</span></p>
<!-- paragraph:p0061 -->
<p class="p2"><br></p>
<!-- paragraph:p0062 -->
<p class="p1"><span>여러분, 아브라함이 정말 위대한 이유, 아브라함이 정말 우리 믿음의 귀감이 되고 믿음의 영원한 조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그토록 소중한 외아들이었지만, 막상 하나님이냐 아들이냐고 했을 때 단호하게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고민하지 않았어요.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끝내 하나님이 절대였어요. 하나님도 시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네 독자 이삭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모든 축복을 다 받아라 너뿐만 아니라 네 자손만대까지 받아라. 하늘의 별처럼 저 바닷가의 모래처럼 받아라.</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3 -->
<p class="p2"><br></p>
<!-- paragraph:p0064 -->
<p class="p1"><span>오늘 본문 여호와 이레에서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삶의 궁극적인 근거가 눈에 보이는 독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있었다는 거예요.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의 무서운 원칙과 철칙은 바로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절대주의였습니다. 이걸 우리가 뭐라고 한다구요? 모노 야웨이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절대주의,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가 바로 모노 야웨이즘입니다.</span></p>
<!-- paragraph:p0065 -->
<p class="p2"><br></p>
<!-- paragraph:p0066 -->
<p class="p1"><span>모노 야웨이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평생 여호와 이레의 위대한 축복을 누리게 한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서나 한결 같이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면, 우리의 외아들도 지키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도 받지만, 그렇지 않고 외아들 중심주의, 외아들 제일주의, 외아들 절대주의로 살면 결국은 외아들도 잃고 하나님도 여호와 이레의 축복도 다 상실하게 된다는 거예요.</span></p>
<!-- paragraph:p0067 -->
<p class="p2"><br></p>
<!-- paragraph:p0068 -->
<p class="p1"><span>여러분, 혹독한 시련의 와중에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하며 삽시다. 그리고 시험을 잘 견디고 잘 극복합시다. 외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황당한 시험, 최악의 시험을 이긴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그게 비록 가혹할지라도 반드시 잘 통과합시다. 그리고 매사에 하나님 절대주의, 하나님 제일주의, 모노 야웨이즘을 관철하며 삽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모든 필요와 또 우리의 내일을 친히 준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평생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9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70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71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7IshEEAbKDI"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