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6] 평화의 하나님 (삿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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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삿 6:24
평화의 하나님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오늘 이 본문에 유명한 말씀 나오죠. 여호와 샬롬, 여호와는 평화,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인사말이 샬롬이잖아요. 남에게 축복을 빌어줄 때도 샬롬, 축언으로 샬롬 그럽니다. 그 샬롬이 바로 이 여호와 샬롬에서 왔습니다. 여호와 샬롬의 준말이 그냥 샬롬입니다. 샬롬의 원형이 바로 여호와 샬롬입니다. 여호와는 평화, 여호와 샬롬입니다.
신약 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평화라는 고백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보면 성령을 평화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영, 평화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여호와는 샬롬, 평화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평화의 주님이시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의와 평강을 추구하게 하시는 평화의 영이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곧 평화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백성들인 우리 믿는 자들이야말로 당연히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에 헌신하는 평화의 도구, 평화의 전도사, 평화의 사도, peace maker여야 한다는 게 옳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평화시니까,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야말로 peace maker로 살아야 마땅하고 옳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랬잖아요. 산상보훈에서 평화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평화케 하는 자, 평화를 만드는 자, peace maker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예요.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너희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평화를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평화를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평화를 도모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예뻐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 주시고 불러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 앞으로 평화를 추구하며 peace maker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너희를 특별히 구별해서 택하셨다는 거예요. 전에는 어떻게 살아왔든 이제 우리가 신자가 된 이상은 늘 평화를 도모하며 사는 게 옳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니까, 믿는 자들은 다 적극적으로, 보다 능동적으로 평화에 기여하며 살아야 합니다. 평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평화를 위해 봉사하며 평화에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사명입니다. 그 것이 우리 믿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씀을 우리가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평화라고 하는 말인 구약 히브리어의 살롬이나 신약 헬라어의 에이레네라는 말은 무슨 관념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변적인 말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관계적 개념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화라는 것은 반드시 누구와의 관계, 무엇과의 관계에서만 의미가 있고 또 성립이 된다는 거예요. 그걸 떠나서는, 어떤 관계를 떠나서는 평화라고 하는 말도 한낮 공허한 추상명사에 그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를 얘기하면서 반드시 묻고 확인해야 할 그 관계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당연히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먼저 따지고 짚어봐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평화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가 곧 우리 모든 평화의 기본이고 근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하지 못하고 불화하면 다른 모든 관계도 다 망가집니다. 다 화평하지 못한 불화의 관계가 되고 맙니다. 불편한 관계, 갈등관계, 적대관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부르시면서 뭐라고 했죠?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아담의 지리적인 위치, 지정학적인 위치를 물은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말씀이라고 했죠. 네가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너의 소재지가 어디냐 그걸 물은 게 아니라, 네가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네가 지금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있느냐 아니면 갈등 관계에 있느냐?
아담으로 말하면 범죄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 좋았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자 곧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계속 달아난다고 했죠. 계속 숨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됐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극도로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파탄이 온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기 아내와의 관계에도 망가집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셔서 저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저로 하여금 이 선악과를 따서 먹게 했습니다. 자기 범죄에 대한 책임을 자기 스스로 지지 않고 아내에게 전가하잖아요. 하나님이 제게 여자를 주셔서 그 여자가 나를 꼬셔서 저로 하여금 범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문제는 제가 아니라 제 아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자기 아내를 고발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괜찮으십니까? 화평하십니까? 불화하고 불편한 관계, 긴장관계 소원한 관계는 아니십니까?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화가 없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이 두려워 그걸 피하거나 끊임없이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는 관계라면, 그 사람의 삶에는 절대 평화나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잘 지키고 잘 관리하고 건강하고 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바로 내 존재와 내 삶의 기본입니다. 거기에 내 생의 진정한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평안하기를 바란다면, 내 심령이 늘 평화 가운데 거하기를 소원한다면,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화롭지 못하면서 다른 관계가 다 잘 되고 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참 어리석습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평화가 나의 모든 관계의 첫 단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의 화해, 자신과의 평화가 또한 중요하잖아요. 의외로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늘 불화 속에서 지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에 대한 불신 ,자신에 대한 회의, 자신에 대한 미움, 그래서 날마다 자학하고 비관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사람들도 뜻밖에 많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먼저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먼저 받아들이십시오. 자신과 먼저 화해하고 화평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이해하십시오. 그래야 화평케 하는 자, 평화를 만드는 자, 피스 메이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죠. 물론 그것은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말씀이지만 그 이웃 사랑에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사랑이 전제돼 있잖아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네 자신처럼 사랑해라. 네 존재처럼 사랑해라. 이웃 사랑의 기본이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 자신과의 평화, 자신과의 화해가 곧 이웃과의 화해, 이웃과의 평화, 이웃에 대한 사랑의 대전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화평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이웃과 화해하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웃 사랑의 전제가 곧 자기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며 받아주셨는데 왜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날마다 학대하며 사는 걸까요. 하나님은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왜 아직도 나를 용서하지 못할까요. 자신과 화해하시고 좀 더 자신을 긍정하며 사랑하십시오. 이제는 자신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절대 이 수순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자신과의 화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없는 자신과의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용납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용납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을 용납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평화와 평안의 이 선순환적인 혹은 악순환적인 구조를 잘 이해하십시오. 하나님을 용서해야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여러분, 이기적으로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한 것도 문제지만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고 엄격하고 냉정한 것도 절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부디 자신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좀 더 자신을 사랑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평화를 이룩하십시오. 그게 나를 향하신 주님의 진정한 뜻입니다.
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형제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형제, 이웃과 참 잘 못 지내죠. 이웃과의 관계에 거의 평화가 없습니다. 필요 때문에 대화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한다 이해한다 그러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거의 평화 없이 지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늘 불안정하고 위태하잖아요. 화평은커녕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이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잖아요. 이게 문제고 이게 불행입니다. 지난 삼위일체주일 때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는데, 하나님은 원래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고 했죠.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칭호도 El 단수가 아니라 단수 하나님이 아니라, Elohim 복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세 분 하나님이 서로 간에 완벽한 조화와 평화를 이루며 완전한 하나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세 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한다구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명명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성서적인 하나님입니다. 세 분 하나님인데도 우리가 세 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세 분인데도 완전한 하나를 이룩하며 사시기 때문에, 완벽한 조화 속에서 타협 속에서 평화 속에서 지내시기 때문에, 마치 한 분인 것처럼 지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리적으로 삼위일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수 하나님,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태초에 뭐라고 하셨죠?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러시면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러시면서 오늘 우리를 창조하셨거든요. 우리처럼 사람을 만들어서 우리처럼 살게 하자 그러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만 우리로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로 존재합니다. 사람도 우리로 존재해요. 우리로 존재할 때만 사람이에요. 우리가 아닌 독불장군은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오늘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처럼 공동체로 우리로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도 하나님처럼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남과 이웃과 형제와 더불어 살 때만, 우리로 존재할 때만 진정한 사람이고 인간입니다. 마치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화평하며 완벽한 하나로 존재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이웃과 형제와 서로 사랑하며 화해하며 화평하게 지내야 그게 진정한 삶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창세기 3장 9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셨는데, 그다음 장인 4장 9절에 가면, 하나님이 다시 묻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 말씀 역시도 위치를 물으신 게 아니고 형제와의 관계를 물으신 겁니다. 네가 지금 네 형제 아벨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네가 지금 네 동생 아벨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하고 물으신 겁니다.
가인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지가 동생을 돌로 쳐 죽여 놓고도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제가 아벨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벨과의 형제 관계, 이웃 관계를 부정한 겁니다. 제가 아벨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왜 그걸 제게 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또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심으로써 이웃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를 확인하십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저 북녘 동포들이 있잖아요. 어제가 6.25 72돌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북이 가인과 아벨처럼 한 형제와 한 자매인데도 지난 70여 년 동안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정말 가인과 아벨처럼, 야곱과 에서처럼,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저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서로를 미워하고 적대하고 저주하고 증오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어떻게든 이걸 풀어야 합니다.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화평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바로 이 시대에 우리 민족의 평화를 위해 부름 받은 평화의 사도들이라는 거예요. peace maker라는 겁니다.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본질상 죄의 종들이기 때문에 어떤 말과 어떤 행동으로 그럴 듯하게 꾸미고 치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끝까지 trouble maker이지 peace maker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남북 간의 화해며 평화며 통일 문제를 오직 세상 사람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뭐 그런 이벤트 못 봤습니다만, 예전에 우리가 북한에 식량을 보내고 물자를 보내고 또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날 때, 태극기 달고 갔습니까 인공기 들고 이산가족이 서로 만났습니까? 적십자기 들고 갔잖아요. 저는 항상 거기에서 어떤 계시를 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주님만이 만나게도 하시고 화해도 하게 하시고 교류하게 하시고 평화를 도모하게 하시고 앞으로도 십자기 들고 적십자기 들고 만나고 교류하고 그럴 겁니다. 우리가 하라는 거예요. 믿는 자들이 앞장서서 그런 일들을 도모하라는 거예요.
부디 여러분 각자가 다 평화의 전사가 되십시오. 명실상부한 peace maker가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도 화평하시고, 자신과도 화해하시고, 이웃과도 또 북한 동포들과도 화평을 이루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훗날 평화의 왕국인 천국에서도 영원히 평화를 누리며 사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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