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2] 쿠오 바디스 도미네? (요 21:18-23)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220612
요 21:18-23
쿠오 바디스 도미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유명한 교부가 있습니다. 터툴리안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분은 그 자신도 순교자입니다. 220년에 순교하신 분인데, 그분이 살아 생전에 늘 그런 말을 했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곧 교회의 씨앗이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 좀 끔찍한 표현이긴 합니다마는 그건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기독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와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인 야고보 같은 사람의 피 위에 세워졌잖아요.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사도를 위시해서 콜로세움에서 혹은 카타콤에서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피를 마시고 자랐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도 그렇습니다. 신구교가 다 순교로 시작했습니다. 먼저 가톨릭을 보면 1784년 당시 통역관이었던 김범우의 집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이 되는데, 이게 바로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원입니다. 1784년 그 김범우의 집이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입니다. 또 그때 거기에 참여한 함께한 조선 천주교회 창립 멤버들을 보면 다 쟁쟁합니다. 이벽, 이승훈, 정약용, 정약전 등입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1785년에 그들이 다 잡혀 들어가죠. 관에 불려갑니다. 서양의 사교 집단을 결성했다고 누가 신고를 해서 다 잡혀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이미 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인물들이었고 양반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풀려납니다. 다만 김범우만, 이 사람은 역관 출신의, 번역관 출신의 중인이잖아요.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김범우만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유배를 갑니다. 경남 밀양 단장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유배간 지 2년 만인 1787년 9월 14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극심한 고문 후유증 때문에 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그 김범우를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순교자로 꼽습니다. 보통은 김대건 신부가 첫 순교자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김대건은 조선인 신부로서 최초 순교한 사람이고, 순교한 시점도 김범우보다 59년 뒤인 1846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가톨릭의 첫 순교자인 김범우의 영세명이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1784년 가톨릭에 처음 입문할 때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승훈이 세례명을 토마스라고 줬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뒤에 출범한 개신교 쪽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는 누굽니까? 신기하게도 역시 토마스죠.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공식적인 원년은 알렌 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인데, 토마스 선교사는 그 알렌 선교사보다 무려 18년이나 앞선 1866년에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다가 평양 대동강변에서 조선 관군에게 목 베임을 당합니다. 참수를 당합니다.
그러니까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가 미처 출범하기도 전에 이미 순교부터 당한 겁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9월 7일에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옥스포드 의과대학 장학생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런던 대학 뉴칼리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아버지가 목회하던 고향 교회에서 24세에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기 일 년 전에 결혼을 하죠. 잉글랜드 영주의 딸인 캐롤라인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바로 그해 8월,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부인과 함께 선교하러 중국 상해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부인 캐롤라인이 죽습니다. 중국에서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산이 되면서 결국 산모까지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이 토마스 선교사는 미리 중국에 나와 있던 선임 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토마스 선교사가 본국 선교본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865년 1월에서 8월까지 청나라 해상세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를 하는데, 거기서 조선상인 두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내에 대한 정보를 입수를 하죠.
조선에는 지금 약 5만 명 가량의 가톨릭 신도가 있고, 11명의 가톨릭 사제가 있고, 가톨릭의 기도문 같은 그런 문서들은 있지만 아직 성경은 없다는 것, 그리고 개신교라는 존재 자체를 한국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 조선에 대한 이런 정보는 토마스를 대단히 흥분시켰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이야말로 자기가 꼭 가야 할 새로운 선교지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그해 9월 세관에 통역관직을 던지고, 런던 선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을 받아서, 조선으로 가는 배편을 찾았는데, 그때 만난 배가 바로 미국의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였습니다.
1866년 8월 9일,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행 선교 여행길에 오릅니다. 제네럴 셔먼호는 중국에서 출항한 지 일주일 만에 대동강 입구인 용강 주영포에 입항을 해서 거기서 다시 평양 쪽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8월 27일 평양 한사정에 정박을 하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때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쁠 때였습니다. 결국 조선 관군들과 무력 충돌이 발생합니다. 9월 2일 제네럴 셔먼호가 양각도 모래톱에 갇혀 결국 좌초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불타는 셔먼호 갑판 위에서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성경을 다 강가로 내던지고 마지막에는 한 권을 자기 가슴에 품고 강물에 뛰어내렸는데 결국은 조선군에게 생포되어강가로 끌려 나옵니다. 격분한 조선 군관들이 승선자를 다 살해하고 토마스 선교사도 그 강변에서 처단을 하는데, 그때 형 집행관이 바로 박춘권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자 토마스 선교사가 급히 자기 품에서 성경을 꺼내 그에게 건넸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박춘권이 칼로 토마스 선교사에 목을 칩니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는 그렇게 조선 땅을 제대로 한번 밟아보지도 못한 채 꽃다운 27세의 나이로 순교의 제물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죠? 아닙니다. 기적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고 목을 친 박춘권은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1899년에 평양교회의 영수, 곧 장로가 됐습니다. 또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을 받았던 장사포의 홍신기는 후에 석가교회를 설립했고, 서호정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은 후에 평양교회를 설립했습니다. 또 받은 성경을 뜯어서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 주사 박영식은 후에 자신의 집을 널다리 교회로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평양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했을 만큼 개신교가 가장 융성했던 한국 기독교회, 한국 개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도 1901년에 설립한 평양신학교였습니다. 초기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다 그 평양신학교 출신들입니다. 지금 우리 교단의 장로회신학대학도 바로 그 평양신학교 후신이잖아요. 그래서 올해로 창립 121주년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토마스 선교사의 그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물을 마신 사람들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다 그렇게 기독교 신자가 된 겁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해인 1866년 1월 12일 런던 선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에 선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꼭 저를 그리로 보내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가서 그 땅에서 죽겠습니다.” 제가 이런 순교의 각오가 돼 있으니까 저를 꼭 그 땅에 보내주십시오. 그랬던 겁니다. 제가 가서 그 땅에서 죽겠습니다.
당시 대동강변에서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친 박춘권의 보고서, 진술서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 서양 사람들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내가 그의 목을 베려하자 그가 두 손을 마주잡고 눈을 감은 채 무사한 말을 한참 한 후에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며 나에게 받으라고 했다. 내가 그를 죽이는 사람이기는 하였으나 그 책은 받지 않을 수 없어 받아 집으로 가져왔노라.”
그렇게 박춘권이 집으로 가지고 와서 그걸 읽고 신자가 된 거예요. 토마스를 죽인 지 33년이 지나서 평양교회 핵심 장로(영수)가 됐어요.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묘하게도 한국교회는 이렇게 구교와 신교의 첫 순교자가 다 토마스입니다. 토마스의 순교의 피 위에 우리 한국의 구교와 신교가 세워졌습니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요. 당연히 성경에서 왔죠. 사도 가운데 도마 있잖아요. 토마스를 우리말로 도마라고 번역했습니다. 도마는 어떤 제자였습니까? 참 의심이 많았던 회의주의자, 실증주의자였죠.
한번은 도마가 없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이 그 사실을 도마에게 전하자 도마가 믿지 않았죠.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의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으며 그의 옆구리의 창자국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단코 믿지 않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마가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도마에게 뭐라고 하셨죠?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에 넣어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비로소 도마가 주님 앞에 엎드려 당신이야말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죠?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그 후에 도마는 태국 파티아와 인도 남동부인 코로만델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결국은 그 인도에서 순교합니다. 원주민들의 창에 희생됩니다. 그래서 인도 남부에는 토마스와 관련된 성지가 많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12절입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바로 이 사건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로마로 갑니다. 아무래도 예루살렘에 있으면 또 잡혀갈 수 있으니까요. 당시 로마에는 이미 바울의 영향으로 교회가 조직되어 성장하고 있었고 로마 황제들의 기독교 박해도 갈수록 더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외경인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후 67년에 네로 황제의 극심한 박해를 피해서 피신을 하게 되죠. 신자들이 간곡하게 권유를 했습니다. 여기 있다가는 죽으니까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은밀하게 로마를 탈출하는데 로마 외곽에서 갑자기 자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그러니까 로마 시가지를 향해 황급하게 가고 계신 주님과 마주치죠.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이 뭐라고 하셨죠? 에오 로맘 이테룸 크루키피기(Eo Romam iterum crucifigi),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가노라. 베드로가 거기서 통곡을 하며, 아닙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그 길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순교를 하는데, 어떻게 했다구요? 자진해서 역 십자가에 달리잖아요.
저도 로마 외곽에 있는 그 쿠오바디스 기념 교회를 가봤습니다. 로마 시가지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 아우렐리우스 성벽까지 가면 거기에 성문이 하나 나옵니다. 세바스티아노 성문이 나오는데, 그 성문을 막 나오면 거기서 한 1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카타콤베 방향으로 한 1km 정도 내려가다가 보면 왼쪽에 아주 작은 쿠오바디스 도미네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폴란드 소설가 생키에비치가 노벨상을 받은 작품인 쿼바디스에도 잘 묘사가 돼 있고, 또 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쿼바디스라는 영화에도 잘 나오듯이 베드로는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겠느냐며 제발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달아주시오. 그래서 결국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는데,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이 요한복음 본문이 바로 베드로의 그런 최후를 주님이 미리 암시하시면서 예언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본문 18절 이하를 한번 보십시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었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내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의 그런 참혹한 최후를 주님이 미리 예견하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순교한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 묻혔고, 후에 가톨릭교회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를 해서 그의 무덤 위에 역사상 가장 큰 교회인 베드로 성당을 짓고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추대했습니다. 또한 그 베드로 성당과 베드로 광장을 바티칸, 즉 가톨릭교회의 메카로 삼았습니다.
물론 우리 개신교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 반석을 인간 베드로로 보지 않고 당시 베드로가 말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게 아니라 베드로가 당시 고백한 그 위대한 그 신앙고백이 진정한 반석이다. 신앙고백을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교회다. 개신교는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자 주님의 사도요, 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은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초대교회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또 우리 한국 교회 초기 순교자들을 생각합시다. 이 위대한 믿음과 순고한 희생정신을 기립시다. 또 우리도 그들의 값진 순교 정신을 충실히 계승할 것을 다짐합시다. 결단합시다. 또 우리 다음 세대에도 순교자들의 그런 고귀한 믿음을 전승합시다. 부디 순교 신앙으로 승리하시고, 지금 여러분이 겪고 계신 모든 시련과 고난도 그 순교신앙으로 이기시고 극복하시는 복된 성도, 복된 산 순교자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