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5] 아담과 아다마 (창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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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5
창 2:7
아담과 아다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지난 화요일이었죠. 5월 31일이 바다의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유엔이 세계 환경의 날을 제정한 지 벌써 50주년이 됐습니다. 또 오늘은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환경주일입니다.
여러분, 자연과 인간, 환경과 우리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요? 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을 보면 우선 자연은 다 말씀으로 창조하죠. 창세기 1장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는 대목인데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첫째 날,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는데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참 완벽했더라, 최상으로 아름다웠더라는 겁니다.
11절 이하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같이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돼요.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4절 이하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자연을 다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 날, 엿새째 창조하신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게 아니죠. 1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어떻게 하셨다구요? 2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보십시오. 사람은 말씀이 아니라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 나오는 흙은 히브리말로 아다마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히브리말로 아담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어원은 아다마입니다. 사람의 어원은 흙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 3장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죠? 하나님이 아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허무를 말씀하신 대목이 아니고 인간도 자연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흙이라는 겁니다. 사람도 자연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은 언제나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 운명체라는 겁니다.
이 창세기 3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인데, 뭐라고 하셨죠?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어지는 18절 상반절도 보십시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니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건 아담인데 사람인데, 범죄한 것은 분명히 인간인데, 왜 애꿎은 땅까지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때부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고, 또 누구도 그 이마에서 땀이 흐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게 다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은 결과라는 거예요. 땅에서 가시나무가 돋고 엉겅퀴가 나고, 또 사람이 땅을 파고 개간해서 아무튼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결과라는 거죠.
노아의 때도 그랬습니다. 이 창세기 6장 5절 이하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아니 사람의 죄가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계획이 항상 악해서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면, 사람만 쓸어버리시면 될 일인데 왜 죄 없는 가축이며 공중에 새까지도 다 멸절하시겠다고 하실까요? 6장 17절도 보십시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왜요?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항상 자연과 인간을 한통속으로 보시며 늘 똑같은 처분을 하시느냐 하는 거죠. 그것은 처음부터 자연과 인간, 아다마와 아담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의 이런 숙명적인 관계는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이유 외에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1장 26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그렇게 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렇게 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는 모든 자연을 다 인간에게 맡기셔서 이 피조세계를 네가 관리하라, 네가 이제부터는 자연과 환경의 관리자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를 인간에게 위임하시는 대목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이 자연에 대한, 환경에 대한, 이 피조세계에 대한 관리권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위탁하셨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인간이 자연의 운명을 접수하게 된 겁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자연과 인간이 명실상부한 운명 공동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면 자연도 함께 타락하고, 인간이 저주를 받으면 자연도 함께 저주를 받고,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도 파멸하고, 또 인간이 새로워지면 자연도 회복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의 사상, 바울의 자연관을 보면 이게 더 분명해집니다. 로마서 8장 19절 이하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들도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들이 이제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쓴 시점이 언제입니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때 자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였겠죠. 원초적인 상태 그대로 아니었겠습니까? 그때 무슨 오염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무슨 환경 파괴 같은 게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그때 이미 들에 핀 한 송이 장미나 백합을 보며 자연을 예찬하거나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기보다는 자연의 신음 소리를, 자연이 고통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감이 가는 말씀이지만, 2,000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저게 무슨 소린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제정신인가, 그렇게 말했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이, 온 자연이 완벽하고 아름다운데 무슨 자연이 고통한다는 건가? 무슨 자연이 신음소리를 낸다는 건가?
그런데 바울은 이미 그때 자연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부정적이고, 얼마나 비관적인 자연관입니까. 그러면서 바울은 자연이 지금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 즉 중생한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이 나타나기만을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연도 회복될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귀에는 안 들리죠. 그러나 하나님의 귀에는 자연의 비명 소리가 점점 더 커집니다. 영성의 귀가 밝았던 사도 바울은 이미 2,000년 전에 자연의 그런 깊은 탄식을 들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못 듣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의 귀에는 자연의 탄식이 점점 더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겪고 당하고 있는 온갖 자연재해며 코로나19 같은 감염병도 다 인간의 죄와 타락이 부른 저주 아닙니까? 앞으로도 인간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타락하면 할수록 자연의 신음 소리도 커지고 처절해지고 또 더 독하고 더 치명적인 재앙들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겁니다. 그래서 자연은 지금도 오로지 거듭난 사람들,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다 많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오직 우리 인간들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 이 우주의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서도 오직 우리 인간들만을 지키시고 축복하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오해고 착각입니다. 그건 너무도 아전인수식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가장 즐겨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인간만 사랑하사, 인간만을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 못지않게 자연도 사랑하시고 환경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환경도 위하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인간 중심으로만 성경을 이해하고, 나 좋을 대로만 말씀을 적용해 왔습니다. 노아의 방주도 한번 보십시오. 축구장 크기의 유조선 모양의 배인데, 그 내부가 3층으로 돼 있기 때문에 연면적은 축구장 세 개 규모입니다. 그만큼 큰 배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큰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노아로 하여금 120년간이나 그렇게 큰 배를 건조하게 하셨을까요?
노아의 방주는 결코 사람만을 위한 구원의 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노아의 방주를 통해 자연도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자연에게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안배하셨습니다. 당시 노아의 방주의 1층과 2층은 각종 짐승들을 실었잖아요. 1층과 2층은 짐승들만 실었습니다. 3층에는 노아 가족의 양식과 1, 2층에 타고 있는 짐승들의 여물, 사료를 적재했습니다. 그리고 3층 한 귀퉁이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탔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자연도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사랑하십니다. 인간 못지않게 사랑하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날아가는 공중의 새를 보라 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죠. 왜 새를 보고,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을까요?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도, 저 들에 핀 이름 없는 꽃 한 송이도,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아름답게 입히시고 돌보신다는 거예요. 그 자연에 대한,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죠.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의 머리카락만 새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날아가는 이름 없는 새 한 마리의 깃털까지도 다 새고 계십니다.
자연은 숭배의 대상도 아니지만 절대 파괴나 학대나 약탈의 대상도 아닙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보호하고 잘 지키고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우리의 영원한 이웃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천적이 아니라, 저주도 축복도 회복도 구원도 심지어는 영생까지도 함께할 우리의 영원한 반려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 우리의 영원한 공동 운명체입니다.
우리는 보통 천국에는 하나님과 천사와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훗날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성취될 영원한 부활의 세계도 우리는 오직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나라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죠. 오히려 성경은 그 나라를 자연 중심적으로, 자연친화적으로 표현하잖아요. 뭐라고 하죠?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잖아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11장 6절 이하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우리가 함께 살 영원한 나라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해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양과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들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나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더는 해함도 상함도 없으리라” 완벽하게 회복된 에덴과 같은 세상, 그게 우리가 앞으로 살 영원한 세상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다 이 몸을 벗고 부활체로 변화돼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입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시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여러분,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우리도 사람도 완전한 부활체로 새롭게 변화되는 세계지만, 자연도 환경도 완벽하게 회복된 새 세계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더 이상 오염이나 공해 같은 게 없고 오직 수정같이 맑고 푸른 강이 흐르고 푸른나무, 푸른 숲만 있고 생명나무 실과가 날마다 달마다 새롭게 열리고 다시는 그 어떤 저주도 눈물도 한숨도 병도 아픔도 전쟁도 코로나19도 그 어떤 감염병도 암도 뇌출혈도 심장병도 치매도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세계, 그게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연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갈 새 세계이고 부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장차 영원히 살 나라는 절대 자연이 배제된 인간들만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받았다는 말씀이나, 지금도 자연이 신음하며 고통하며 하루빨리 인간들이 다 새롭게 거듭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좀 더 진지하게, 좀 더 아프게 들으시며 자연에 대해 보다 책임적으로 또 따뜻한 이웃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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