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2] 오순절과 성령 강림절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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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행 2:1-4
오순절과 성령 강림절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주일이 다 소중하죠. 그런데 성령 강림절인 오늘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의 기원은 부활절이 맞지만 교회의 산실, 교회의 구체적인 출범은 바로 오늘 본문의 이 성령 강림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40일간 이 땅에 더 계시다가 내가 다시 오리라고 그렇게 재림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시는데, 그때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뭡니까? 사도행전 1장 4절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에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고는 그들이 보는 데서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의 그 당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이 약속하신 그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에 힘썼는데 그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의 수가 약 120명쯤 됐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기다린 성령이 언제 임했습니까?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오순절을 기해서 강림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인 2장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또 마지막 4절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게 바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발생한 첫 성령 강림 사건이고, 또 이렇게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120명의 성도들이 바로 원시 기독교 원조 교회인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최초 공동체, 첫 교회는 인위적으로 계획적으로 조직하고, 무슨 개척교회를 하듯이 창립 예배를 드리고 시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형성된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 공동체가 바로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최초의 교회, 원초적 교회였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기원이 된 그 성령 강림 사건이 언제 발생했다구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다는 거예요. 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이 다 한 곳에 모였더니 마치 불에 혀 같은 것이 각 사람들 위에 임하며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고 하잖아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사건이 왜 하필이면 오순절에 발생했을까요? 왜 오순절 성령 강림일까요? 우연입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고 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순절은 어떤 절기죠? 맥추절이잖아요. 맥추감사절,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맥추절이 유대인들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맥추절에는 오순절 말고도 또 다른 이름이 있죠. 뭡니까? 초실절입니다. 왜 맥추절, 오순절이 초실절일까요? 보리가 바로 한 해 농사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맥추절, 오순절을 초실절이라고도 명명을 합니다. 보통은 봄에 씨앗을 뿌려서 가을에 수확을 하잖아요. 그런데 보리는 가을에 씨를 뿌려서 초여름에 수확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밭작물 가운데서 보리를 가장 먼저 수확하잖아요. 그래서 매년 7월 첫 주일이 맥추감사절이잖아요.
그렇습니다. 보리가 한 해 농사의 첫 열매이듯 성령 강림도 이제 막 시작된 교회 시대,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인 이 종말 시대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굳이 초실절이었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겁니다. 교회 시대의 첫 열매, 이 말세 시대의 첫 열매,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의 첫 열매, 그게 성령 강림 사건이어서 굳이 오순절에 초실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의문이 있습니다. 초실절인 오순절을 기해 교회 시대의 첫 열매인 성령이 강림하셨다면 그 이전 다시 말해서 구약시대 때는 성령 강림이 없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죠. 있었죠. 사무엘상 16장 13절입니다. “이날 이후로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크게 역사하니라” 이어지는 14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에게는 성령이 크게 역사하셨고 사울에게서는 계시던 성령이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 때도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강림하셨습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주님 위에 머무르셨다고 했잖아요. 오순절 전인데도요. 그러니까 오순절 전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성령의 시대는 아니었다는 거죠. 부분적으로, 잠정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강림하셨지만, 구속사적으로 볼 때 그때는 아직 성령이 역사의 주체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창조시대와 구약 시대 때는 성부의 시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서 성부가 구속사의 주체였던 시대, 곧 구약 시대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신 때는 성자가 구속사의 주체였던 성자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전개되고 있는 이 교회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이 구속사의 주체이십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 마지막 시대, 이 말세 시대의 주인공은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이 바로 이 마지막 성령 시대를 여는 공식적인 사건이었다는 거죠. 본격적인 성령 시대를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거예요.
당시 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참 대단하고 요란했습니다. 본문 2절 이하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늘로부터 굉장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넘실거리는 불길이 사람들 위에 임하고 또 모두가 방언을 했다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언제나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지금도 만약 바람 소리라든가 불같은 현상이라든가 방언이 안 터지면, 그건 성령이 역사하시거나 강림하신 게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요즘은 이런 현상이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게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은 성령이 제대로 역사하시지 않거나 제대로 강림하시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하시고 또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니까, 성령이 역사의 주체이시지만, 그러나 초대교회 때와는 좀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나타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성령 강림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오해가 발생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나타난 놀라운 이적들이 그 이후 모든 성령 강림 현장에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믿으시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성자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성령의 새 시대를 여는, 성령의 새 역사를 널리 알리는 선언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도래한 그 새 시대를 강렬한 인상으로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란한 퍼포먼스가 동원이 된 겁니다.
따라서 특별했던 그 오순절 성령 강림 현상을 보편화해서 모든 성령 강림은 다 이런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믿으면 그건 맞지 않습니다. 바람 소리가 안 나고 불이 안 보이고 방언이 안 터지면 그건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부터는 성령의 새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물증을 제시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과 함께 강렬하게 임하셨던 것이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고 역사하신다고 해도 거의 그런 신비한 현상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요즘도 성령이 역사하실 때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또 방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성령의 역사에 다 그런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거예요. 바울은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뭐라고 했죠?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게 더 확실한 성령 강림의 산 증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성령 없이는, 성령의 감동 없이는,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를 자기의 구주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도 초자연적인 신비보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주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보혜사란 곁에서 지키고 보호하며 은혜를 베푸는 사람, 베푸는 자라는 뜻입니다.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 곁에 라는 뜻의 파라와 부르다는 뜻의 클레오라는 말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클레오라고 하는 부르다 라는 뜻의 동사가 결합이 된 명사형 낱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곁으로 부름을 받아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도 실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는 파라클레토스, 보혜사이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땅을 떠나시며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고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마, 나 말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마,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를 보내마, 성령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우리의 무엇을 돕게 하겠다고 하신 겁니까?
먼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러분,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도 그 존재를 모릅니다. 성령을 모릅니다. 성령은 오직 믿는 자만이 알고, 믿는 자 안에만 거하시고, 믿는 자만이 느끼고, 또 믿는 자만이 그와 영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여러분, 절대 목사가 아닙니다. 구역장이 아닙니다. 교회 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은혜 받게 하시고 아멘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너희를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3절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여러분, 누구도 자기 의지로, 자기 노력으로 예수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00년 전 저 팔레스틴으로 오셨다가 불과 33년 만에 다시 이 땅을 떠나셨다는 그 전설 같은 유대 사나이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이 바로 나의 주님이라고 진지하게 고백하는 일이 정말 제정신으로, 맨 정신으로 가능할까요? 정말 성령에 붙잡히지 않고는, 성령에 씌이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사도들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갈팡질팡했습니까. 심지어는 부활하신 주님을 몇 번이고 직접 만났는데도 다시 낙향해서 옛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나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야말로 다 불덩어리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외치고 다니다가 다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기꺼이 죽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예수 믿는다고 누가 떡을 줍니까 돈을 줍니까. 그럼에도 왜 이 구차한 신앙생활을 계속할까요?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교회 나오신 분 계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적나라하게 얘기하면 오늘도 우리는 다 본의 아니게 성령께 이 자리에 끌려 나온 겁니다. 우리는 늘 성령의 강제로 교회에도 나오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며 예수를 믿는 것이지, 누구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신의 수고로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성령께 덜미가 잡혀 날마다 천국으로 강제 견인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가장 큰 사역이 성도의 견인, 곧 천국까지의 견인하는 것입니다. 견인차는 움직이지 못하는 차를 강제로 끌고 가잖아요. 우리는 날마다 본의 아니게 성령에 붙잡혀가지고 천국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견인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신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왕이면 성령 충만해야 그만큼 더 신앙생활을 잘하게 된다는 거예요.
다음으로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가 빌 바를 모른다는 겁니까? 다들 기도를 얼마나 잘하는데요. 그런데도 성경은 성령이 탄식할 정도로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곡을 찌른 말씀 아닙니까? 세상에서 우리처럼 빌 바를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기도하라고 하면 다들 시는 잘 쓰지만 정작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이 내게 꼭 필요한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늘 구하는 기도의 품목들을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밤낮 썩어질 것, 정욕에 쓸 것, 결국은 나를 해칠 흉기들이잖아요. 그것을 달라고 날마다 빌 잖아요. 정말 우리는 한 번도 뭘 제대로 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성령은 하나님의 뜻도 가장 잘 아시잖아요. 하나님 자신이시니까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소원, 우리의 필요도 성령은 꿰뚫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지 성령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빠른 기도, 가장 기도다운 기도를 드리실 줄 아는 진정한 기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변변히 기도하지도 않고 또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며 늘 엉뚱한 것을 구하며 살아도 하나님이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지금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성령 충만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마가복음 3장 28절 이하입니다.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렇죠. 우리는 늘 입으로는 성령 충만을 얘기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삶으로는 언제나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훼방하고 근심시키고 소외시키고 외면하고 묵살하고 학대하고 고문하고, 철저하게 성령을 소멸하며 삽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얼마나 무서운 얘기입니까. 그러나 그게 엄연한 현실이고 사실 아닙니까? 부디 내 곁에서, 아니 내 안에서 지금도 나를 돕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늘 그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으며 사시는 이 마지막 시대에 가장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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