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청년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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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청년이 주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나이다>(막 10:17-19)라고 했습니다. 실로 그는 모범 청년이자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훌륭한 신자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성경은 주님도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막 10:21)고 했습니다. 따라서 누가 봐도 그 청년이야말로 영생의 관문을 훌륭하게 통과할 수 있는 자질과 신앙을 갖춘 사람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뜻밖입니다.
<네가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
당사자인 청년은 물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도대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영생 얻을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청년은 주님의 그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에 낙심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막 10:22)고 했는데, 오늘 우리 역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주님의 그 요구는 우리조차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말씀의 현실성 문제도 되짚어봐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기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못 미친다고 영생에서 제한다면 그 책임은 도리어 하나님 편에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그런 뜻이 아니라면 주님이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야 비로소 인간답다는 것이고, 거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고 또 영생이 있다는 단호한 가르침이셨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널렸는데도 정당하게 벌었다는 것으로 나만 즐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으로 영생은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긴다면 그런 태도야말로 근본적으로 복음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지적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자기 가진 것을 남과 나누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실현될 수 있을까요?
특히 청년들의 경우 자신의 젊음, 패기, 용기, 능력, 시간, 열정 등을 가난한 형제들,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요?
따라서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그 청년의 고뇌는 그게 그대로 오늘 우리들의 고뇌를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게 그만큼 어려운 게 사실이므로 주님도 그 점은 인정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하시며 근심하는 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막상 선택의 기로에 서자 결국 <영생>보다는 <재물>을 꽉 움켜쥐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며 운을 뗐으나 실은 영생보다 재물에 미련이 더 커 <근심하며>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도 가난도 병마도 고통이나 신음도 눈물도 없는 영원한 평화의 표상입니다.
부디 재물이나 소유보다는 사랑과 나눔과 희생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늘 영생을 추구하며 사는 청년과 성도들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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