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4] 필레오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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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4
요 21:15-17
필레오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우리는 대개 첫사랑에 실패하죠.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은 흔치가 않습니다. 첫사랑에 성공하신 분 계십니까? 왜 그럴까요? 왜 첫사랑에는 실패할까요? 처음 하는 연애라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그때는 마음만 앞서고 감정만 뜨겁지 능력은 아직 없잖아요. 사랑을 지속적으로 관리할 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또 그 시기는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잖아요. 그래서 이성관계를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가져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대개 첫사랑에는 실패합니다. 그저 첫사랑은 애틋한 추억으로만 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만이 아니라 주님도 첫사랑에 집착하십니다. 첫사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 주님께는 우리가 다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맨 처음의 사랑으로 끝까지 가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첫사랑이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왔다 갔다 하지, 우리가 변하지 주님께는 우리가 다 첫사랑인데, 그 맨 처음에 우리를 사랑하시던 그 감정으로, 그 정서로 이 세상 끝까지 가신다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절대 주님은 첫사랑을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주님에 대한 그 첫사랑, 초심을 버리면 주님은 많이 실망하시고 좌절하시고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주님의 첫사랑으로 남아주기를 바라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4절 이하입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그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여 보고 그 처음 사랑을 되찾으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서 촛대를 옮기리라”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책망이자 경고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라, 되찾으라.
지난 주일이 부활절이었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례되시고 나서 안식 후 첫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몇몇 여인들이 주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무덤을 찾아갔는데,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옆으로 옮겨져 있고 무덤 안에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28장 5절 이하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것을 보라 그리고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그를 배우리라 하라” 마가복음 16장 5절 이하입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며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배우리라 하라”
여러분, 주님이 왜 굳이 부활하신 그 예루살렘이 아닌 먼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진 제자들이 아직 그 예루살렘에 숨어 있고, 주님을 따르던 갈릴리 여인들도 아직 큰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그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데, 어째서 예루살렘이 아니고 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예루살렘은 로마 정권과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군중들이 야합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곳이고, 사흘 전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주님의 피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곳이잖아요. 거짓이 진리를 누르고, 증오가 사랑을 유린하고, 죽음이 삶을 조롱한 곳이잖아요. 만약 주님이 그때 갈릴리가 아니라 그 예루살렘 어디에선가 만나자고 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아하 드디어 복수하나 보다. 드디어 봉기하나 보다. 그럼 그렇지 이제 드디어 외세인 로마를 몰아내고 주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알고 있었잖아요. 기대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의 상경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누가 주님 우편에 누가 주님 좌편에 설 것인가 그 권력 다툼까지 했잖아요.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대결의 장소요 분노의 장소요 투쟁과 증오의 장소인 예루살렘 말고, 거기서 100km 이상 떨어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제자들의 고향이자, 삼 년 전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신 첫사랑의 장소죠. 따라서 갈릴리는 대립과 싸움과 증오와 죽음 이전의 장소이고, 사랑과 복종과 신뢰만이 지배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이 살벌한 예루살렘 말고 저 첫사랑의 장소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신 겁니다.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사랑과 초심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싶으셨던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제자들은 너무나도 큰 충격과 좌절로 심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마음 깊은 상처를 안고 피를 질질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위기에 처한 어떤 부부가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프러포즈했던 첫사랑의 장소를 찾아가서 다시 화해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듯, 주님도 그렇게 제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굳이 먼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활하신 주님이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실제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3년 전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던 그 갈릴리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시고 친히 생선을 구우시며 밤새 조업하고 뭍으로 나온 제자들을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와서 먹어라. 내가 생선을 구워놨다. 와서 먹어라.
제자들이 식사를 마치자 주님이 드디어 베드로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몇 번 그렇게 물으셨다구요? 세 번 거푸 물으셨잖아요. 왜 세 번이냐구요?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 숯불가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며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지금 삼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잡히시던 날 저녁,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습니다. 있는 대로 큰소리를 쳤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이 오늘 밤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호언장담하며 자기는 절대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주님의 예언대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잖아요. 부인한 정도가 아니라 저주까지 했잖아요. 그래서 주님이 지금 더도 덜도 말고 딱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만큼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확인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이 아니라,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물으신 겁니다.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주님을 가장 사랑해주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돼요. 주님은 우리가 다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내 부모나 내 자식이나 내 친구나 내 애인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최고로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그것을 확인하시는 거예요.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여기 베드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언제나 그것을 묻고, 그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거기에 각주가 붙어있죠. 각주 2번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아래 각주난 2번을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뭐라고 돼 있죠? 이것들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헬라어 원문상 이 부분을 이 사람들 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것들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보다로 해석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금 베드로 곁에 있는 다른 제자들이나 동료 형제 가족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런 물음이 되지만, 만약 이것들보다로 해석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무슨 뜻이 될까요? 이것들이라면 뭡니까? 주님의 지시대로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서 배 가득 물고기를 건져 올렸잖아요. 그러니까 이 많은 물고기들보다, 이 많은 소유나 재산보다, 돈보다, 통장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신 거예요.
주님은 늘 이 두 가지를 묻고 확인하십니다. 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너는 돈보다 재산보다 물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늘 이 두 가지를 물으시며 우리의 주님 사랑,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시는데, 당시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어휘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말과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할 때 사용한 사랑이라는 말이 서로 다르다는 거예요. 다른 사랑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둘 다 같은데, 우리는 어휘에 한계가 있으니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이 다양하지 않아서 그냥 사랑으로 다 번역을 했는데, 원어에는 엄연히 어휘가 다릅니다. 단어가 다릅니다.
주님은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가페는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님 사랑, 절대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답할 때 말한 사랑은 아가페가 아닙니다. 뭐라구요? 필레오. 필레오는 어떤 사랑입니까? 절대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의리, 우정 같은 친구지간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계속 아가페, 절대적 사랑, 영원한 사랑으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계속해서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합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내가 주님을 필레오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베드로도 당연히 아가페로 대답을 했겠죠.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모진 실패를 통해 그만큼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아가페로는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 물음은 주님도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요, 세 번째 물음은 주님이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로 물으셨습니다. 본문 17절의 세 번째 물음은 더 이상 아가페가 아닙니다. 필레오입니다. 주님도 필레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이 지금까지 사용하시던 아가페를 철회하시고 의리나 신의, 우정 같은 필레오로 그 급수를 낮추셨을까요?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신 거죠. 주님이 양보하신 겁니다. 아가페 수준이 못 되는데 자꾸만 아가페만 고집하면, 아가페만 강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힐링은 고사하고 자칫 상처가 덧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한 발 후퇴하신 겁니다. 물러서신 겁니다.
그러자 비로소 베드로의 대답에도 자신이 붙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차마 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로는 대답하지 못할지언정 베드로처럼 필레오로 만큼은 꼭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이해하시고 그것을 접수하십니다. 내가 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필레오도 된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무엇보다도 상처받은 우리의 심령을 어루만지시며 치유해주시고 반드시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이 많은 물고기보다 너의 재산보다 은행 통장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시면서 나의 진실한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오늘 모두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비록 완벽한 아가페는 아니더라도 필레오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도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 수준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이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놓여나는 치유를 받고 앞으로는 더 강건하게 살아가며 더 깊이 주님과 영적으로 교감하며 더 복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주의 성도, 또 주의 가정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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