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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div>2011년 8월 14일 주일오후예배</div>

<!-- paragraph:p0002 -->
<div>본문: 마 5:9</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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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평화</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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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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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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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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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를 도모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평화의 왕이라 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시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도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사기 6장 24절에 여호와 샬롬이 나오는데,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를 보면, 그는 우리의 평화시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성령을 평화의 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평화의 왕이요, 주님과 성령이 평화이시므로 피스 메이커야 말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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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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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그런데 오전예배 때 해방이나 자유니 하는 개념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말로 샬롬, 헬라말로 에이레네는 다 관계적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화의 관계를 맺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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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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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첫째,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선적으로 지켜나가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평화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평하지 못하면 모든 관계의 평화는 깨집니다.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관계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평화의 상대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이 범죄한 직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아담의 소재지를 확인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못 찾아서 그랬을까요? 무엇을 물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담의 위치를 물으신 게 아니라 관계를 물으신 겁니다. 아담이 범죄하면서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묻고 계신 겁니다. 범죄한 후 아담이 에덴동산 숲에 숨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이 무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화평하게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게 모든 평화의 기본이요 근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필사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화로 가져갈 때 우리는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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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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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둘째, 화평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심각한 병은 자신에 대한 회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이제는 점점 더 자기 소외현상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울증입니다. 자기에 대한 좌절, 회의, 소외가 우울증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화평이 깨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늘 평화스럽게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을 긍정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의 기준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한 애정과 정서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이웃 사랑의 모범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줄 모르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웃도 미워합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과도 화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납해야 이웃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십시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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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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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셋째, 우리는 이웃과의 평화에 복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할 때만 이웃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과의 평화는 우리 민족에게 절박하고 절실한 과제입니다. 남북한이 한 형제인데 아직도 화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처럼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한 혈육인데 우리는 서로 증오하며 원수지간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화평은 우리 민족에게 늘 큰 숙제입니다. 지난 60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은 서로 증오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웃과의 화평은 정치인들의 과제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도 독일처럼 교회가 주도해야 합니다. 독일은 서독의 교회가 목요기도회를 통해 평화의 물고를 텄고 선봉장이 되어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교인들이 한 겁니다. 우리는 민족과의 화해를 소명으로 받은 자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과제가 된 겁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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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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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마지막으로 자연과의 화평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화해의 가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평, 자신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의 가교입니다. 그 십자가의 다리를 건너면 다 화해가 가능합니다. 자연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자연과 우리는 영원히 함께 갑니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반려입니다. 구원은 우리만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받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자연도 새로워집니다. 자연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갑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았으나,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자연도 함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학대하면 안 됩니다. 자연과의 화평을 도모해야 하며, 이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연이 우리와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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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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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모든 관계에서 화평을 추구할 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광복기념주일을 맞아 우리가 평화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깁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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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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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설교영상보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oeXVnO6rXcs$</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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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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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br><!-- paragraph:p0024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div>

<div class="archive-resource-links"><a href="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oeXVnO6rXcs$" title="원문 미디어 링크 (이용 상태 미확인)"></a></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