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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20320] 세 개의 십자가 (눅 23:32-33, 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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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a href="http://thegreen.or.kr/./files/attach/images/59/249/060/ab6ed9b57a4b898ad24901c56ed51041.png" class="image-placeholder">0320.png</a></p>

<!-- paragraph:p0002 -->
<p> </p>

<!-- paragraph:p0003 -->
<p><span> </span></p>

<!-- paragraph:p0004 -->
<p> </p>

<!-- paragraph:p0005 -->
<p><span> </span><strong><span>[가정예배 기도문]</span></strong></p>

<!-- paragraph:p0006 -->
<p class="p2"> </p>

<!-- paragraph:p0007 -->
<p class="p3"><span>주님,</span></p>

<!-- paragraph:p0008 -->
<p class="p3"><span>주님의 날 아침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3"><span>여전히 일일 확진자가 기록 갱신을 거듭하고 있어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이렇게 한 주 한 주 비대면 예배를 이어가고 있사오니 주께서 하루 속히 이 최악의 팬데믹 상황을 평정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0 -->
<p class="p3"><span>사망자도 크게 늘고 있사오니 이 땅의 비극과 혼란을 주님이 친히 수습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1 -->
<p class="p4"> </p>

<!-- paragraph:p0012 -->
<p class="p3"><span>지금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이고, 오늘은 그 셋째 주일입니다.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저희들 되게 하사 오늘 드리는 이 가정예배도 주님께 영광이 되고 저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치유와 축복이 되게 해주시옵소서.</span></p>

<!-- paragraph:p0013 -->
<p class="p4"> </p>

<!-- paragraph:p0014 -->
<p class="p3"><span>환자들을 찾아 가사 주님의 뜨거운 손으로 안수해주시고, 주일임에도 가정예배조차 드리기가 여의치 않은 성도들을 위로하사 그 사정을 헤아리시며 더 큰 믿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5 -->
<p class="p4"> </p>

<!-- paragraph:p0016 -->
<p class="p3"><span>주님,</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7 -->
<p class="p3"><span>저 강원도 산불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또 전쟁으로 집과 가족들을 잃고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기억하사 위로와 희망을 허락하시고, 하루 속히 종전이 이루어져 다시금 고향과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8 -->
<p class="p4"> </p>

<!-- paragraph:p0019 -->
<p class="p3"><span>주님,</span></p>

<!-- paragraph:p0020 -->
<p class="p3"><span>저희 가족, 저희 가정도 축복하사 늘 안전하고 건강하게 하시고, 올해도 기도하고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 감사하며 주께 영광 돌리는 2022년이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1 -->
<p class="p4"> </p>

<!-- paragraph:p0022 -->
<p class="p3"><span>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깨달음을 주시고, 주님의 뜨거운 육성을 듣고 결단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span></p>

<!-- paragraph:p0023 -->
<p class="p4"> </p>

<!-- paragraph:p0024 -->
<p class="p3"><span>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span></p>

<!-- paragraph:p0025 -->
<p class="p3"> </p>

<!-- paragraph:p0026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I2x3EhY0SPs" title="미디어 원본"></a></span>

<!-- paragraph:p0027 -->
<p class="p3"> </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20220320m</span></p>

<!-- paragraph:p0029 -->
<p class="p1"><span>눅 23:32-33, 39-43</span></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세 개의 십자가</span></p>

<!-- paragraph:p0031 -->
<p class="p2"> </p>

<!-- paragraph:p0032 -->
<p class="p3"><span class="s1">32 </span><span>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span><br>
<span class="s1"><span>33 </span></span><span>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span></p>

<!-- paragraph:p0033 -->
<p class="p3"><span class="s1">39 </span><span>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span><br>
<span class="s1"><span>40 </span></span><span>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span><br>
<span class="s1"><span>41 </span></span><span>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span><br>
<span class="s1"><span>42 </span></span><span>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span><br>
<span class="s1"><span>43 </span></span><span>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span></p>

<!-- paragraph:p0034 -->
<p class="p2"> </p>

<!-- paragraph:p0035 -->
<p class="p2"> </p>

<!-- paragraph:p0036 -->
<p class="p1"><span>주님이 처형되신 당시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죠. 가운데는 주님이시고 양쪽에는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성경에 들지 못한 외경 가운데 니고데모 복음이라고도 하는 빌라도 행전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거기에 이 두 강도에 대한 얘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원래 사촌간인데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며 온갖 못된 짓을 같이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살인강도로 체포되어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됐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7 -->
<p class="p2"> </p>

<!-- paragraph:p0038 -->
<p class="p1"><span>원래 십자가 형은 죄수 자신이 자기가 달릴 십자가 형틀을 지고 형장인 골고다까지 행진을 하게 돼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인 안토니오 요새에서 골고다까지는 약 1.5km,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그 좁고 긴 비아 돌로로사를 오르시다가 몇 번이나 쓰러지셨고, 마지막에는 결국 쓰러진 채 십자가에 짓눌려 더는 일어나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행관인 로마 군인이 길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워서 골고다까지 올라가지 않습니까.</span></p>

<!-- paragraph:p0039 -->
<p class="p2"> </p>

<!-- paragraph:p0040 -->
<p class="p1"><span>그렇다면 그때 두 강도는 어땠습니까? 물론 그들도 자기가 달린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는데 빌라도 행전을 보면, 당시 그들은 그냥 행진을 한 게 아니고 소리 소리를 지르며 온갖 저주와 욕설을 다 퍼부어댔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같이 달리신 주님까지도 욕하며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며 조롱하더라” 오늘 본문 39절도 보십시오. “달린 행학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주님을 비웃었다고 합니다.</span></p>

<!-- paragraph:p0041 -->
<p class="p2"> </p>

<!-- paragraph:p0042 -->
<p class="p1"><span>그런데 그 최후의 순간, 십자가상에서 참 희한한 일,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한 강도와 함께 소리 지르며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들을 욕하고 같이 달리신 주님마저도 조롱하며 비웃었던 한편 강도가 돌연 심경에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는 겁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졸지에 강도의 이런 부탁을 받은 주님은 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43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3 -->
<p class="p2"> </p>

<!-- paragraph:p0044 -->
<p class="p1"><span>그러니까 보십시오. 당시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그 세 개의 십자가는 기막힌 상징이자 영원한 구원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운데는 주님의 십자가이고, 좌우에는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죄를 범한 두 강도의 십자가가 섰는데, 그 중 하나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회개와 기도로 천국을 갔고 또 다른 하나는 끝까지 주님을 비웃고 욕하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구원과 저주의 그 영원한 운명의 갈림길에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이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야말로 모든 인생들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들의 구원과 저주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라는 뜻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5 -->
<p class="p2"> </p>

<!-- paragraph:p0046 -->
<p class="p1"><span>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천국을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비웃고 신앙을 조롱하다 결국은 지옥을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노아의 홍수에 비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7 -->
<p class="p2"> </p>

<!-- paragraph:p0048 -->
<p class="p1"><span>여러분, 노아의 홍수는 본래 그 목적이 뭐였습니까?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위한 목적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들에게는 오히려 그 홍수가 방주를 물에 띄워주는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의 홍수였지만,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오히려 결정적인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9 -->
<p class="p2"> </p>

<!-- paragraph:p0050 -->
<p class="p1"><span>그런데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겁니다. 믿고 주님 앞에 나오면 십자가야말로 나를 살리는 구원의 표상이지만, 미련하다며 배척하고 부정하면 오히려 그 십자가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면치 못한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1 -->
<p class="p2"> </p>

<!-- paragraph:p0052 -->
<p class="p1"><span>오늘 구원 받은 이 강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철저한 마이너스 인생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어릴 때부터 부랑자로 살았으니까 무슨 세례를 받았겠습니까. 주일을 성수하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했겠습니까? 무슨 구제를 하고, 자선을 하고, 전도를 한 번 했겠습니까? 이날 이때까지 그저 남에게 못된 짓만 하고 강도짓 한 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그것도 사형틀인 십자가에 높이 달린 채 죽어가면서 극적으로 예수를 믿은 것뿐인데, 놀랍게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낙원을 보장받지 않았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저주하고 주님을 욕하던 그 입으로 돌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호소한 것뿐인데, 서론도 없이 그저 본론만 겨우 한 마디 한 것이 전부인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주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겁니다. 평생 강도로 살아온 사람답게 누가 고수 아니랄까봐 마지막에는 천국까지도 그렇게 훔친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3 -->
<p class="p2"> </p>

<!-- paragraph:p0054 -->
<p class="p1"><span>그래서 의외로 이 강도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이 강도처럼 평소에는 좀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강도야말로 가장 경제적으로, 가장 실리적으로 천국을 간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맞습니까? 이 강도가 정말 가장 복된 사람입니까? 물론 숨 넘어가기 직전에 회개해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가게 된 것은 큰 다행이고 행운인 게 사실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5 -->
<p class="p2"> </p>

<!-- paragraph:p0056 -->
<p class="p1"><span>그럼에도 늘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구원은 결코 복된 구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런 사람도 분명 턱걸이로 천국은 가지만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은 별로라는 겁니다. 천국의 상급, 천국의 영화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믿음의 내용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에 평생 안 믿고 살다 막판에 극적으로 회심하고 천국 간 사람들이나 오늘 본문에 이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한 건 잘해서 천국을 훔친 사람들은 천국을 가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한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 이하입니다. “누구든지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땅에서 세운 공적이 많으면 훗날 천국에 가서도 큰 상을 받지만, 이 땅에서 축적한 공적이 없으면 구원은 받되, 천국은 가되 마치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은 것 같을 것이라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7 -->
<p class="p2"> </p>

<!-- paragraph:p0058 -->
<p class="p1"><span>이게 무슨 뜻일까요? 불난 집에서 겨우 구조된 사람들 보십시오. 목숨은 건져서 천만 다행이지만 그 꼴은 말이 아니잖아요. 호텔에서 자다 불이 나서 뛰쳐나온 사람들, 목욕탕에서 때 밀다가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세운 공적이 없어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상급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그렇게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사람들처럼 부끄러운 모습, 남루한 행색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경고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9 -->
<p class="p2"> </p>

<!-- paragraph:p0060 -->
<p class="p1"><span>그럼에도 우리가 여기서 하나 꼭 짚어야 할 것은 그게 비록 부끄러운 구원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그 마지막 순간에 한 편 강도가 그런 극적인 회심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도 불가사이하게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여전히 다른 한 강도와 함께 세상을 저주하고 비웃던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한순간에 변해서 뜬금없이 주님께 구원을 청했느냐 하는 겁니다. 정말 수수께끼 같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은 같은 마을, 같은 환경에서 지금까지 똑같은 짓을 하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한 강도는 회개를 하고 다른 한 강도는 끝까지 회개를 하지 못하고 죽었느냐 하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1 -->
<p class="p2"> </p>

<!-- paragraph:p0062 -->
<p class="p1"><span>정말 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고 또 비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한 편 강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숨 떨어지기 직전 그렇게 나마 회개를 하고 결국은 천국 갈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비록 살인 강도였을망정 그 사람은 엄연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였기 때문에 주님이 그 최악의 순간에서도 포기하시지 않고 강제로 회개시키셔서 급하게 천국으로 데려가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3 -->
<p class="p2"> </p>

<!-- paragraph:p0064 -->
<p class="p1"><span>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강도만이 아니라 실은 오늘 우리도 다 그와 같은 케이스들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천국을 가시게 된 겁니까? 회개해서요? 믿어서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5 -->
<p class="p2"> </p>

<!-- paragraph:p0066 -->
<p class="p1"><span>그렇죠. 맞습니다. 그럼 남이 못하는 회개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게 됐고, 남이 못 가진 믿음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되셨습니까? 남보다 더 잘나서요? 남보다 더 착해서요? 남보다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해서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7 -->
<p class="p2"> </p>

<!-- paragraph:p0068 -->
<p class="p1"><span>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남보다 더 못 났고 더 어리석고 더 못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남이 못하는 회개를 하고 남이 못 믿는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 천국을 가게 된 것일까요? 이 한편 강도의 수수께끼와 같이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이 나를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택하사 천국 백성으로 예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도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고, 내가 회개해서 천국을 가게 된 게 아닙니다. 이미 일방적인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주님이 나의 믿음을 강제하신 것이고, 나의 회개를 강제하신 것이고, 나의 천국행을 강제로 확정해주신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불가항력적인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span></p>

<!-- paragraph:p0069 -->
<p class="p2"> </p>

<!-- paragraph:p0070 -->
<p class="p1"><span>오늘 본문에 강도와 가장 대조가 되는 인물이 있죠. 누굽니까? 잘 나가다가 역시 막판에 주님을 배신하고 자살해서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지금 가장 깊고 뜨거운 제9 지옥에 가 있는 사람, 가룟 유다 아닙니까. 가룟 유다는 어떤 케이스죠?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주님의 사도가 됐는데 막판에 타락해서 주님을 배신하고 결국은 제9 지옥에 떨어진 사람입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1 -->
<p class="p2"> </p>

<!-- paragraph:p0072 -->
<p class="p1"><span>아닙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음도 기쁨도 천사도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도 사탄도 타락도 죄악도 살인 강도도 죽음도 우리를 결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천국 백성이라는 우리의 신분, 우리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거나 무효화할 수 있는 것은 천상천하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결코 택함 받은 사람이었지만 믿음에 실패해서 타락해서, 주님을 배신해서 버림받고 저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그는 이미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가라지였다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3 -->
<p class="p2"> </p>

<!-- paragraph:p0074 -->
<p class="p1"><span>그게 진실입니다. 처음부터 양이 아니라 염소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밀밭에 나는 가라지처럼 알곡에 섞여 있다가 결국은 추수 때 주인의 곳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불구덩이에 던져진 케이스라는 거죠. 창세전에 이미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신앙생활에 실패해서 지옥 가는 법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한 편 강도는 생전에 오로지 남을 괴롭히며 강도 짓 한 것뿐인데도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회개하게 해서 기어이 천국을 가게 하시지 않습니까? 다만 택함 받은 백성이 이렇게 못나게 굴다가 죽으면 생전에 오로지 강도짓만 하다가 죽으면 마치 불 속에서 겨우 구원만 받은 사람처럼 부끄러운 꼴로, 참혹한 모습으로 천국을 가게 되는 비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점을 명심하고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5 -->
<p class="p2"> </p>

<!-- paragraph:p0076 -->
<p class="p1"><span>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로 택해주셨을 뿐 아니라 또 이렇게 일찌감치 불러주셔서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를 위해, 상급을 위해 뭔가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와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본인이 결단하기에 따라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은혜가 보장돼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제약이 많고 또 큰 불편도 겪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찬양도 할 수 있고 말씀도 가까이 할 수 있고 주일도 지킬 수 있고 전도도 할 수 있고 헌신도 봉사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훗날 천국 가서 영원히 누릴 영화를 마음껏 준비할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과 기회를 베풀어주신 것 아닙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남보다 예수를 일찍 믿게 된 것이 절대 손해가 아니고 그만큼 내게 축복이지 않습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7 -->
<p class="p2"> </p>

<!-- paragraph:p0078 -->
<p class="p1"><span>따라서 절대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순간에 천국을 훔친 강도를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감사하시고, 나를 일찍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하시며 더욱 세월을 아끼시고 건강을 아끼시고 또 내게 주어진 기회를 허송하지 않고 아끼시며 오직 주님을 위해 사십시오. 그게 바로 내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삶이자 또 훗날 천국에 가서 내가 누릴 영화를 보다 책임적으로 준비하는 인생임을 깊이 깨닫는 폭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9 -->
<p class="p2"> </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