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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20306] 불혹은 없다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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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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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a href="http://thegreen.or.kr/./files/attach/images/59/203/060/aafccd45bd3cea7df1d36d03286a1e18.png" class="image-placeholder">0306.png</a></p>
<!-- paragraph:p0002 -->
<p><span>

</span></p>
<!-- paragraph:p0003 -->
<p><span> </span></p>
<span>
</span><!-- paragraph:p0004 -->
<p><span><strong><span>[가정예배 기도문]</span></strong></span></p>
<span>
</span><!-- paragraph:p0005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06 -->
<p><span>주님,</span></p>
<span>
</span><!-- paragraph:p0007 -->
<p><span>오늘도 저희들 가정에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span></p>
<span>
</span><!-- paragraph:p0008 -->
<p><span>예배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사 이 비대면 예배가 저희에게는 축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큰 기쁨과 영광이 되는 산 제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span></p>
<span>
</span><!-- paragraph:p0009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10 -->
<p><span>주님,</span></p>
<span>
</span><!-- paragraph:p0011 -->
<p><span>&lt;코로나19&gt; 확산세가 여전합니다. </span></p>
<span>
</span><!-- paragraph:p0012 -->
<p><span>더구나 지금은 방역마저 많이 느슨해져 그 기세가 더욱 무섭습니다. 주님이 통제해주시고 친히 다스리사 하루 속히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 가사 위로하시며 안수해주시고, 주일 가정예배조차 힘든 성도들의 사정을 헤아리사 그 형편을 원만케 하시며 최소한 주일예배는 드릴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span></p>
<span>
</span><!-- paragraph:p0013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14 -->
<p><span>주님,</span></p>
<span>
</span><!-- paragraph:p0015 -->
<p><span>올해도 주님의 고난을 기리며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span></p>
<span>
</span><!-- paragraph:p0016 -->
<p><span>더욱 절제하고 자제하며 기도하는 절기가 되도록 성령으로 저희를 단속해 주시옵소서. </span></p>
<span>
</span><!-- paragraph:p0017 -->
<p><span>저희 가족 모두가 이 봄에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무엇보다 신변이 안전하고 그 마음과 영혼이 주 안에서 강건하므로 늘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span></p>
<span>
</span><!-- paragraph:p0018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19 -->
<p><span>주님,</span></p>
<span>
</span><!-- paragraph:p0020 -->
<p><span>이 시간도 저희들 말씀을 상고할 때 깨달음과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며 결단하는 소중한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span></p>
<span>
</span><!-- paragraph:p0021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22 -->
<p><span>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span></p>
<span>
</span><!-- paragraph:p0023 -->
<p><span><br></span></p>
<span>
</span><!-- paragraph:p0024 -->
<p><span><br></span></p>
<!-- paragraph:p0025 -->
<p><span>
</span></p>
<!-- paragraph:p0026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as-YsQHPlYU" title="미디어 원본"></a></span>

<!-- paragraph:p0027 -->
<p></p>
<!-- paragraph:p0028 -->
<p></p>
<span>
</span><!-- paragraph:p0029 -->
<p></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20220306m</span></p>
<!-- paragraph:p0031 -->
<p class="p1"><span>마 4:1-11</span></p>
<!-- paragraph:p0032 -->
<p class="p1"><span>‘불혹’은 없다</span></p>
<!-- paragraph:p0033 -->
<p class="p2"><br></p>
<!-- paragraph:p0034 -->
<p class="p1"><span>1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span></p>
<!-- paragraph:p0035 -->
<p class="p1"><span>2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span></p>
<!-- paragraph:p0036 -->
<p class="p1"><span>3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span></p>
<!-- paragraph:p0037 -->
<p class="p1"><span>4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span></p>
<!-- paragraph:p0038 -->
<p class="p1"><span>5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span></p>
<!-- paragraph:p0039 -->
<p class="p1"><span>6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span></p>
<!-- paragraph:p0040 -->
<p class="p1"><span>7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span></p>
<!-- paragraph:p0041 -->
<p class="p1"><span>8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span></p>
<!-- paragraph:p0042 -->
<p class="p1"><span>9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span></p>
<!-- paragraph:p0043 -->
<p class="p1"><span>10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span></p>
<!-- paragraph:p0044 -->
<p class="p1"><span>11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span></p>
<!-- paragraph:p0045 -->
<p class="p2"><br></p>
<!-- paragraph:p0046 -->
<p class="p2"><br></p>
<!-- paragraph:p0047 -->
<p class="p1"><span>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부활절 전 고난 기간이 왜 사순절일까요? 예를 들어 20일 이순절일 수도 있잖아요. 30일 삼순절일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사십일을 뜻하는 사순절일까요? 이 절기가 주님의 40일 간의 광야 고행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째 주일에는 언제나 주님의 40일간의 금식 기도와 또 마귀에게 시험 당하신 이 광야 고행을 되새겨보는 게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돼 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8 -->
<p class="p2"><br></p>
<!-- paragraph:p0049 -->
<p class="p1"><span>그런데 사실 주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 동양권, 유교 문화권에서는 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0 -->
<p class="p2"><br></p>
<!-- paragraph:p0051 -->
<p class="p1"><span>물론 주님은 그 유혹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다 이기셨습니다. 그럼에도 유혹을 당하셨다는 것은 어쨌든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40을 불혹지년(</span><span class="s1">不惑之年)</span><span>이라고 해서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주님은 당시 나이가 아직 마흔이 아니고 막 서른이 되셨기 때문에, 수양이 부족해서 불혹이 아니라 유혹을 받으신 겁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2 -->
<p class="p2"><br></p>
<!-- paragraph:p0053 -->
<p class="p1"><span>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불혹은 없습니다. 마흔이 아니라 100세라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죽는 순간까지 유혹에 시달리고 또 앞에 놓인 과제가 크면 클수록 유혹도 그만큼 크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이렇게 마귀의 유혹을 당하셨지만, 공생애의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시고도 여전히 유혹에 시달리십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며 뭐라고 하셨죠?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렇듯 주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죽음의 쓴 잔을 피하시고 싶은 유혹과 싸우셨습니다. 따라서 불혹지년이란 공자님의 말씀이지 결코 주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불혹지년은 없다고 하십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4 -->
<p class="p2"><br></p>
<!-- paragraph:p0055 -->
<p class="p1"><span>자 그럼 이제 당시 주님이 당하셨던 유혹들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6 -->
<p class="p1"><span>잘 아시는 대로 주님은 그때 세 가지 유혹을 당하셨는데, 그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이유가 뭘까요? 그게 굳이 주님만의 시험이나 유혹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늘 겪고 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시험들이고,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유혹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걸 우리와 똑같이 당하시면서 가장 모범적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이기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귀감으로 삼아야 옳고 맞다는 겁니다.</span></p>
<!-- paragraph:p0057 -->
<p class="p2"><br></p>
<!-- paragraph:p0058 -->
<p class="p1"><span>자 그럼 첫 번째 시험을 한번 보겠습니다. 뭐였습니까? 잘 아시는 대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9 -->
<p class="p2"><br></p>
<!-- paragraph:p0060 -->
<p class="p1"><span>이것은 물질적인 시험, 육체적인 시험입니다. 주님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또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기 때문에 주님도 우리처럼 안 드시면 배고프고 안 마시면 목마른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광야에서 40일을 주야로 금식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만 굶어도 눈이 쑥 들어가고 눈앞에 밥이 왔다 갔다 하는데, 주님은 40일을 완벽하게 굶으셨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없는 명백한 한계 상황이라는 뜻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1 -->
<p class="p2"><br></p>
<!-- paragraph:p0062 -->
<p class="p1"><span>그런데 마귀를 보십시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님을 시험하는데 맨 먼저 떡으로 유혹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귀신같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광야에 널린 모든 돌멩이가 다 떡덩이로 보이는 판인데, 뭐라고 합니까?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 떡덩이가 되게 하라. 얼마나 잔인합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3 -->
<p class="p2"><br></p>
<!-- paragraph:p0064 -->
<p class="p1"><span>더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자기가 더 잘 알면서도 뭐라고 했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럽니다. 얼마나 교활합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이제 꼼짝 없이 돌로 떡을 만들어 주님 자신의 배도 채우고 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상황에 내몰리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5 -->
<p class="p2"><br></p>
<!-- paragraph:p0066 -->
<p class="p1"><span>그럼에도 보십시오. 주님은 결코 거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아니 지금 주님께는 떡이 가장 절실한 생존의 조건 아닙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보란 듯이 돌로 떡을 만들어 당신의 하나님 아들 됨도 증명하시고 또 주린 배도 채우시면 폼도 나고 마귀의 코도 납작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그 시험을 물리치십니다.</span></p>
<!-- paragraph:p0067 -->
<p class="p2"><br></p>
<!-- paragraph:p0068 -->
<p class="p1"><span>왜 그러셨을까요? 4절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당시 주님이 당하신 그 첫 번째 시험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떡이 제일이고, 떡이 전부라는 떡 절대주의, 물질지상주의, 맘몬이즘이 바로 그 첫 번째 시험의 핵심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며 그 시험을 가차 없이 배격하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9 -->
<p class="p2"><br></p>
<!-- paragraph:p0070 -->
<p class="p1"><span>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떡이 전부라며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떡이면 다 된다고 합니다. 떡이 최고라고 합니다. 떡만 있으면 못할 게 없고, 돈만 있으면 누구나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떡에 혈안이고, 모두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것은 다 떡만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우리의 가치관이 철저하게 변질된 탓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1 -->
<p class="p2"><br></p>
<!-- paragraph:p0072 -->
<p class="p1"><span>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다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신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화신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떡이라면, 팥죽 한 그릇이라면 뭐든 다 팔아치울 태세가 돼 있지 않습니까? 신앙도 양심도 영혼도 하나님까지도 얼마든지 팔 수 있잖아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3 -->
<p class="p2"><br></p>
<!-- paragraph:p0074 -->
<p class="p1"><span>여러분, 짐승들은 떡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은 절대 떡만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떡을 필요로 하는 육체만이 아니라, 육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육언 떡으로 살지만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5 -->
<p class="p2"><br></p>
<!-- paragraph:p0076 -->
<p class="p1"><span>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떡에 미쳐 돌아갑니다.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듭니까?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온갖 불법, 편법, 비리, 투기, 뇌물, 비자금, 대장동, 라임 옵티머스 사건 같은 게 다 돌로 떡을 만들려는 억지이고, 추악한 반칙들 아닙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7 -->
<p class="p2"><br></p>
<!-- paragraph:p0078 -->
<p class="p1"><span>그런데 우리는 먹을 걸 잔뜩 쌓아두고도 그 난리를 치는데, 주님은 40일을 굶으시고도 그 떡으로만이라는 마귀의 유혹을 칼처럼 물리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야, 그래야 떡에 함부로 우리의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span></p>
<!-- paragraph:p0079 -->
<p class="p2"><br></p>
<!-- paragraph:p0080 -->
<p class="p1"><span>다음은 두 번째 시험입니다. 뭡니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 이하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span></p>
<!-- paragraph:p0081 -->
<p class="p2"><br></p>
<!-- paragraph:p0082 -->
<p class="p1"><span>이것은 정신적인 시험입니다. 명예심, 허영심, 영웅심을 자극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얼마나 교활한 시험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 공생애를 앞두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도 정말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멀쩡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며 또 그들이 얼마나 열렬히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아마도 하루아침에 유대 사회의 대스타가 되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잘하면 한 방에 사람들의 뜨거운 지지와 인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span></p>
<!-- paragraph:p0083 -->
<p class="p2"><br></p>
<!-- paragraph:p0084 -->
<p class="p1"><span>따라서 우리가 볼 때는 주님으로서도 결코 마다하실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이번 역시도 주님은 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뭐라고 하셨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일은 분명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시험하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뛰어내려서 죽으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살면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거 아닙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85 -->
<p class="p2"><br></p>
<!-- paragraph:p0086 -->
<p class="p1"><span>그러나 그렇게 시험하고 확인해보려는 사랑에는 이미 의심이 전제돼 있잖아요. 주님이 그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겠다며 실제 뛰어내렸다고 가정해봅시다. 혹 몸은 상하지 않는 기적이 발생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깨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물리치신 겁니다.</span></p>
<!-- paragraph:p0087 -->
<p class="p2"><br></p>
<!-- paragraph:p0088 -->
<p class="p1"><span>어떤 믿음 좋은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며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자기가 사는 30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그래 너 믿음 좋다며 사뿐히 받아주셨을까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그런 장난과 무책임한 허세에 놀아나시지 않고 그냥 잘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율동공원에 가서 번지점프를 하면 살아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 꼭대기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100이면 100 다 죽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인간의 그런 천박한 허영심이나 명예심, 공명심 따위나 채워주고 계신답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89 -->
<p class="p2"><br></p>
<!-- paragraph:p0090 -->
<p class="p1"><span>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역시 그와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하며 뭐라고 했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디 거기서 한번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널 믿겠노라. 저 같았으면 그래 요놈들아 하고 내려와서 귀싸대기를 한 대씩 때리고 올라갔겠지만,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1 -->
<p class="p2"><br></p>
<!-- paragraph:p0092 -->
<p class="p1"><span>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지 확인이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건 큰 죄입니다. 하여간 십일조 외에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명백한 모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꾸만 내 사랑을 시험하려 한다면 여러분들은 유쾌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랑이 오래 가겠습니까? 곧 끝장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이나 확인의 여지가 없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면, 하나님이 실망하시고 아주 슬퍼하십니다.</span></p>
<!-- paragraph:p0093 -->
<p class="p2"><br></p>
<!-- paragraph:p0094 -->
<p class="p1"><span>이제 마지막 세 번째 유혹입니다. 뭡니까? 가장 치명적인 시험이죠. 사탄이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8절 이하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span></p>
<!-- paragraph:p0095 -->
<p class="p2"><br></p>
<!-- paragraph:p0096 -->
<p class="p1"><span>이것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적인 시험이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정신적인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아예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영적인 시험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유혹은 갈수록 그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고도를 한번 보십시오. 처음에는 광야 지상이었고, 다음은 성전 꼭대기,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높은 산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당시 그 유혹의 정도와 강도를 뜻합니다. 보십시오. 이 마지막 시험도 얼마나 유혹적입니까? 눈앞에 펼쳐진 세상 모든 부귀와 영화가 한순간에 다 내 것이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span></p>
<!-- paragraph:p0097 -->
<p class="p2"><br></p>
<!-- paragraph:p0098 -->
<p class="p1"><span>그럼에도 거기에 걸린 조건은 딱 하나죠.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그 산꼭대기에서 마귀에게 절 한번 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얼마나 식은 죽 먹깁니까? 그 간단한 일을 왜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아무도 안 보는데, 마귀와 단 둘 뿐인데 왜 그걸 못합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99 -->
<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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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럼에도 주님을 보십시오. 이번에도 역시 일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추상같으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주님께는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첫 시험에서는 떡만을 강요하는 거짓된 절대를 배격하셨는데, 이 마지막 시험에서는 하나님만이라는 진정한 절대를 내세우고 계시잖아요. 주님께는 이 하나님만이라는 믿음이 천하의 그 어떤 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였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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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102 -->
<p class="p1"><span>여러분, 우리가 왜 자주 떡을 절대시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또 세상 영화를 위해 툭 하면 마귀와 수작하고 또 전하게 되는 걸까요? 다 이 하나님만이라는 절대가 미약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이라는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이게 흔들리면, 이게 무너지면 다 흔들리고 다 무너집니다. 그래도 코로나에는 백신이라도 있지만, 마귀의 시험에는 백신도, 항체도 없습니다. 한 차례 지나갔다고 그 시험이 다시 안 오는 게 아닙니다. 똑같은 시험이 평생 반복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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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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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럼에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무슨 희망이요? 이 세 가지 시험을 다 이기신 주님이 계시잖아요. 따라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주님을 내 중심에 모시고 살면 우리도 분명 주님처럼 이런 유혹들을 뿌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부디 갈수록 더 교활해지고 더 악랄해지는 마귀의 물질적인 유혹, 정신적인 유혹, 영적인 유혹을 주님처럼 말씀으로 또 하나님만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다 물리치시고 이기셔서 올해는 보란 듯이 모두가 주님처럼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