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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2m] 말씀과 육신 (요 1:14)

20211212m

요 1:14

말씀과 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이면서 성서주일입니다. 성서주일은 매년 똑같습니다. 12월 둘째 주일에 온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기념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씀과 성탄, 말씀과 주님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성탄이 뭘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잖아요. 이 대목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문장 맨 앞에 <카이>라는 접속사가 있고, 이어서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기네토> 그렇게 돼 있습니다. <호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 로고스는 말씀이고, 사르크스는 육신입니다. 몸, 살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건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됐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물이 증기가 되는 현상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액체가 기체가 되는 현상 기화라고 하죠. 그러면 얼음, 고체가 액체가 되는 현상은 뭐라고 하죠? 액화라고 합니다. 기체가 액체가 되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학적으로 물리학적으로 액화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는 현상은 뭐라고 할까요? 육화죠. 말씀이신 로고스(logos)가 육신인 사르크스(sarx)가 되는 사건이 육화입니다. 이걸 교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는 뭐라고 하죠? 성육신(成育身)이라고 하죠. 성육신할 때의 성은 거룩할 성(聖) 자가 아닙니다. 이룰 성(成) 자입니다. 육신을 이루다 그런 뜻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다. 성육신, 육화, 성육, 화육, 다 똑같은 뜻입니다. 성육신, 말씀이 되다, 말씀을 이루다, 육신을 이루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다.


영어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하는데, 이 인카네이션이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겁니다. 라틴말로 카네이션(carnation)이 육신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인(in)이 붙으면 육화가 됩니다(incarnation, 성육신). 독일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카나치온(Inkarnation), 발음만 다릅니다. 인카나치온, 인카네이션, 육신이 되다, 육신을 이루다, 성육신, 화육, 육화, 성육,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이야 이게 성경에 있는 말씀이니까,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받아들이기가 좀 벅찬 건 사실이고 이해가 좀 잘 안 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대로 믿습니다마는 본래 이 요한복음의 수신자들, 당초 이 요한복음이 선교 대상으로 겨냥했던 헬라인들, 헬라 사람들, 즉 그리스 사람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요한복음의 주장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헬레니즘 전통과 고대 헬라 철학에서는 로고스와 사르크스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거든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개념이거든요. 헬라 사상의 특징은 이원론이잖아요. 헬라인들에게는 로고스가 절대적인 개념, 초월적인 개념, 형이상학적 개념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최고의 선, 우주의 제1원인자인 이데아가 곧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헬라 사람들의 그 전통 사상과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기독교식으로 재해석을 합니다. 이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최초의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라’ 그랬잖아요. 그러면서 로고스가 사르크스, 육신이 되신 사건이 바로 성탄이고,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게 요한복음의 메시지고 또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대단히 충격적이고 신성모독에 해당이 됐다는 거죠. 로고스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로고스가 사르크스, 육신이 됐다는 주장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육신, 사르크스는 곧 그림자고, 어두움이고, 영을 속박하는 굴레고, 영을 가두는 감옥이고, 거짓되고, 악마적인 것이 바로 육이고 육체거든요. 반면에 영은 참이고, 빛이고, 구원받고 천국 가서 영원히 살 인간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따라서 지고지순한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어떻게 거짓되고 부패하고 악마적인 사르크스가 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어불성설이라는 거죠. 빛이 어떻게 어두움이 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진리가 어떻게 거짓이 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게 뭡니까? 가현설(docetism), 로고스가 말씀이 정말 육신이 되신 게 아니고 단지 우리의 눈에 그렇게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다.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다. 사르크스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런 논리를 편 사람들이 바로 초대교회 최대의 사이비 집단이었던 그노시스(gnosis),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에 가장 유명했던 가장 막강한 세력을 시위했던 헬라파 이단입니다.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영지주의, 그노시스.


한때 그들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에 매혹이 돼서 헬라 문화권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지주의에 가담해서 오히려 정통교회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흔들릴 만큼 엄청난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셨다는 주장,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취 사건은 정말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0절 이하를 보십시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성탄을 믿고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인 성육신(incarnation)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까요? 왜 굳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아무도 알아주지도 환영하지도 않는 이 누추한 땅에 성탄하셨을까요? 그 성육신 사건의 진정한 사연, 이유, 필요성이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 질문을 또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역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성탄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육화되시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과 인간은 영원한 타자로 남았을 겁니다. 양자 간의 진정한 소통과 교감과 이해와 교제라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양자 간의 존재론적 간극 때문에 그 둘의 진정한 만남은 영원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초월 존재시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 제한된 존재입니다. 자연적 존재입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 둘이 각자의 차원에 그냥 머물러 있는 한, 만남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같은 차원, 같은 세상에 살아도 서로 종이 다르면 이미 소통이 안 되잖아요. 같은 자연이고, 같은 동물인데도 우리가 다른 짐승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소도 동물이고 인간도 동물인데, 같은 차원인데도, 벌써 이 신호음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 코드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잖아요. 교감이 안 이루어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은 그보다 더 하잖아요. 종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아예 존재론적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또 불쌍히 여기셔서 기어이 대화하시기를 원하셨고, 또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가 다 영생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만남이 필요했고 대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이하입니다. “옛적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옛날에는, 구약 때는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을 하셨죠.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하게 우리 인생들과 소통하시기 위해 시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접적인 방식에는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가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소통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하셨다고요?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게 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보다 직접적인 방식, 즉 아들을 통해 말씀하게 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양자가 서로 만나려면, 그래서 제대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차원을 같게 해야죠.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든가, 사르크스가 로고스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든가, 사람이 하나님이 되든가 해야 합니다. 존재론적 차원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실제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다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인 우리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어서 이 땅에 성탄하신 겁니다. 같은 눈높이로 인간을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 교감하기 위해, 당신의 뜻을 충분히 아낌없이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신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말씀을 버리고 육신이 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제가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액화라고 했죠. 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는 것을 기화라고 했죠. 그러나 얼음이 녹아 액화가 되고 그 녹은 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어 기화를 했다고 해서 물의 본래 성질이 사라진 건 아니죠. 변한 건 아닙니다. H2O입니다. 분자 구조는 똑같습니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서 물이 되는데, 그 물의 본질은 기화가 되나, 액화가 되나 그대로 있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열에 의해서, 온도에 의해서 형태만 변했을 뿐입니다. 물이 기체가 되고, 공기가 수증기가 되고, 또 물이 얼어서 고체가 되어 얼음이 되고, 또 그 얼음을 녹이면 액화가 되고, 그래서 물로 환원이 되어도 여전히 H2O입니다.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삼일일체 하나님이시고 말씀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순간 말씀의 본질이 해소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순간 하나님의 본질이 해소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지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즉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여전히 100% 하나님이고 여전히 100% 말씀이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존재 자체가 그분의 생애와 선포하신 모든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그 존재 자체가 그대로 성자 하나님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어요.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랬잖아요. 따라서 우리가 성탄하시는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만나는 것입니다.


저 헬라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사르크스처럼 보이시는 게 아니고 로고스가 완전히 사르크스가 되신 것이고, 단순히 사람처럼 보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완전히 사람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정체성을 얘기할 때 뭐라고 하죠?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 그러잖아요. 정확한 진술입니다. 정확한 고백이에요.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100% 하나님, 100% 사람이십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그게 바로 성탄을 통해 이루어진 겁니다. 성취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탄을 통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됐고,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대화하며 교감하며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은혜고 축복입니까. 성탄이 없었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도, 하나님과의 소통도, 구원도 없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돼서 성탄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그 모든 게 가능해진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성서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말씀의 육화, 성육신 개념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시며 진심으로 감사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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