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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div><span>20211114m</span></div>

<!-- paragraph:p0002 -->
<div><span>창 21:3-6</span></div>

<!-- paragraph:p0003 -->
<div><span>코로나 시대에도 웃을 수 있을까?</span></div>

<!-- paragraph:p000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5 -->
<div><span>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span></div>

<!-- paragraph:p0006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8 -->
<div><span>의외로 기독교를 우울하고 침울한 종교로 이해를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 교회 생활이 여러 가지로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제한하고 빼앗아 간다고 생각해서 은근히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사람들이 실제 적지 않다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다가는 내 삶의 흥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신앙과 일정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span></div>

<!-- paragraph:p0009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0 -->
<div><span>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절대 신앙 세계에 깊이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태도, 이런 생각, 이런 판단이 옳습니까? </span></div>

<!-- paragraph:p001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2 -->
<div><span>복음서에는 주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죠. 반면에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옵니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주님이 우셨잖아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도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을 보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땀방울이 핏방울만이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고 그랬습니다. </span></div>

<!-- paragraph:p0013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4 -->
<div><span>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공생애의 첫 이적을 어디서 행하셨습니까? 상갓집이 아니라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 아니었습니까? 맹물을 붉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드사 포도주가 떨어져 자칫 흥이 깨질 번한 잔칫집의 분위기를 다시 업 시켜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span></div>

<!-- paragraph:p0015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6 -->
<div><span>그것은 주님이 포도주를 만들어 음주를 장려하신 사건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계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나 고행주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경직된 율법주의나 엄숙주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울하고 칙칙한 염세주의나 비관주의나 현실도피주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span></div>

<!-- paragraph:p001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8 -->
<div><span>유대인들이 주님을 비난하면서 뭐라고 했지요? 저 사람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그 말을 욕으로 했지만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은 늘 죄인들, 세리나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천국은 상갓집이 아니라 잔칫집이라는 뜻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잔치 자리에 참여할지어다.</span></div>

<!-- paragraph:p0019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0 -->
<div><span>주님은 그렇게 늘 천국을 잔칫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도 그렇고,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도 그렇습니다. 천국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야말로 즐거움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겁니다.</span></div>

<!-- paragraph:p002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2 -->
<div><span>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웃음입니다. 동물은 웃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고 울기는 하지만 웃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웃으며 살도록 창조됐습니다. 에덴은 원래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즐거워하며 행복하게 웃으며 살도록 창조해주신 낙원이 바로 에덴이었습니다. </span></div>

<!-- paragraph:p0023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4 -->
<div><span>그런데 범죄하고 타락해서 그 즐거움의 낙원 에덴에서 추방을 당하면서부터 그만 웃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웃음이 변해서 울음이 된 겁니다. 즐거움이 변해서 괴로움이 되고, 기쁨이 변해서 고통과 슬픔이 된 겁니다. 생명이 변해서 죽음이 된 겁니다. 원래는 사람이 태어날 때도 깔깔거리며 웃고 태어나도록 지어졌는데 범죄하면서부터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를 받으면서부터 울며 태어나게 된 것일 겁니다. 부르면 분명 죄와 함께 왔습니다. 불행해서 울고, 쓰리고 아파서 울고, 슬퍼서 울고, 고독해서 울고, 죄 짓고 회개하며 우는 게 바로 범죄한 인간의 수명이 된 겁니다.</span></div>

<!-- paragraph:p0025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6 -->
<div><span>그런데 훗날 우리가 천국을 가면 거기에는 더 이상 웃음이 없다고, 슬퍼하며 곡할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눈에서 그간 흘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기쁨의 나라고 웃음의 나라고 잔칫집 같은 축제의 나라, 영광의 나라지 눈물의 나라가 아닙니다.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span></div>

<!-- paragraph:p002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8 -->
<div><span>성경에서 제일 먼저 웃는 사람으로 기록된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축복의 조상이면서 웃음의 조상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을 하리오 하더라” 하나님이 어느 날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자, 그 해 백세였던 아브라함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웃었다는 거예요.</span></div>

<!-- paragraph:p0029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30 -->
<div><span>그러면서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자기는 그냥 계집종 하갈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을 자식으로 삼고 자식으로 여기며 대충 살겠습니고 하자, 하나님이 다시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그러셨습니다. 작명까지 미리 해주셨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웃음이잖아요. 웃음이에요. 내가 네게 웃음의 아들을 주겠다.</span></div>

<!-- paragraph:p003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32 -->
<div><span>그러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웃습니다.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웃었는데, 18장에서는 사라가 웃었습니다. 특히 사라의 이 웃음은 하나님과 웃음 논쟁까지 벌인 아주 유명한 사건이죠. 창세기 18장 10절 이하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남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사라는 속으로 웃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일단 발뺌을 해봤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속으로 웃는 모습까지도 다 보고 계셨기 때문에 아니라 네가 웃었다고 하십니다. </span></div>

<!-- paragraph:p0033 -->
<div><span> </span></div>

<!-- paragraph:p0034 -->
<div><span>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속으로 웃고, 속으로 우는 모습까지도, 속으로 생각하고 절망하고, 속으로 남을 미워하고 속으로 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까지도 다 보고 다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고 멀쩡한 표정을 짓고 태연한 척 해도 다 보십니다. </span></div>

<!-- paragraph:p0035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36 -->
<div><span>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못 속입니다. 사람은 그 모습만 볼 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으로 웃는 모습까지도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속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니라 네가 웃었다. 그제서야 사라가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데 오늘 본문 마지막 6절도 한번 보십시오 사라가 자기가 웃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span></div>

<!-- paragraph:p003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38 -->
<div><span>누가 자기를 웃게 하셨다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늘 밝은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살게 하는 분이십니다. 보십시오 100세 된 아브라함을 웃게 하시고, 90세 된 사라를 웃게 하신 하나님이 정말 그들 부부에게 웃음의 아들인 이삭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웃게 하시면,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하게 웃으며 삽니다. 하나님이 웃음을 주시면, 부부가 웃고, 자식이 웃고, 이웃들이 다 함께 웃습니다. </span></div>

<!-- paragraph:p0039 -->
<div><span> </span></div>

<!-- paragraph:p0040 -->
<div><span>생각해 보십시오 남편은 100세고 아내는 90세인데 그런 집에, 그런 가정에 무슨 웃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자식도 없는데요. 그러나 하나님이 웃음을 주시니 남편도 아내도 절로 웃게 되더라는 거죠. 그것도 헛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웃음, 행복한 웃음, 기적 같은 웃음을 웃게 되더라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즐겁고, 상상만 해도 행복해서 자꾸만 웃더라는 거죠.</span></div>

<!-- paragraph:p004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42 -->
<div><span>어디 그뿐입니까. 웃음의 아들인 이삭을 보십시오 가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겼습니다. 저 아이가 100세에 낳은 아들이래, 저 아이가 90세 된 호호 백발 할머니가 낳은 아들이래. 보는 사람마다 다 경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신기해하며 웃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다 함께 웃는다고 고백한 거예요.</span></div>

<!-- paragraph:p0043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44 -->
<div><span>그런데 이 웃음의 아들인 이삭이 바로 주님의 모형이라는 겁니다. 주님도 불행한 인생, 범죄에서 웃음을 잃고 늘 고통하며 울며 사는 인생들에게 참 기쁨과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해 오신 분 아니셨습니까? 웃음을 모르고 산 우리로 하여금 웃으며 살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span></div>

<!-- paragraph:p0045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46 -->
<div><span>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전하신 메시지를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라고 하잖아요. 복음이 뭡니까? 헬라어로 &lt;유앙겔리온&gt;(eu;agge;lion, 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lt;유&gt;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lt;앙겔로스&gt;라는 말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기쁨 소식, 복음, &lt;유앙겔리온&gt;. 따라서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 &lt;유앙겔리온&gt;을 듣고 믿으면 누구나 기뻐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쁜 소식을 듣고 슬퍼하거나 울 사람이 있겠습니까? 너무 기뻐서 울면 모를까. 복음이 기쁜 소식인데, 복음은 자식 없이 살아가는 100세 된 남편과 90세 된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된다는 기쁜 소식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그런 기쁜 소식입니다.</span></div>

<!-- paragraph:p004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48 -->
<div><span>올해도 그 기쁜 소식, 그 복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 주님이 새롭게 성탄하실 크리스마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대강절이 이달 마지막 주일부터 시작됩니다. 성탄절 전 한 달, 4주를 우리가 대강절이라고 하잖아요. 주님의 성탄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기간인데, 11월 마지막 주일이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올해도 꼭 기쁜 소식, 행복한 소식을 가지고 성탄하신 주님을 새로운 감격으로 뵙고 모두가 그동안 잊고 살아온 웃음을 되찾고 기쁨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span></div>

<!-- paragraph:p0049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50 -->
<div><span>네로 황제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면서 끝까지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가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것은 바로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미소 띤 얼굴로 죽더라는 거예요. 저게 뭘까? 그는 늘 당황스러워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고 합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웃으며 죽을 수 있을까? 저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가장 참혹하게 가장 처참하게 죽이는데도 말입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하잖아요. </span></div>

<!-- paragraph:p005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52 -->
<div><span>기쁨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웃음, 그 미소는 물리적인 게 아니라 초자연적인 겁니다. 지옥에는 웃음이 없습니다. 처절한 울부짖음과 비명만 가득할 뿐 절대 웃음은 없습니다. </span></div>

<!-- paragraph:p0053 -->
<div><span> </span></div>

<!-- paragraph:p0054 -->
<div><span>여러분은 올해 얼마나 웃으셨습니까? 몇 번 웃으셨습니까? 웃음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웃으며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웃음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디 많이 웃으며 사시기 바랍니다.</span></div>

<!-- paragraph:p0055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56 -->
<div><span>우리가 지금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코로나 시대라 모두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어찌 네로 시대 순교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기고, 불타는 장작더미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천사와 같은 얼굴로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초자연적인 기쁨 속에서 그들의 생을 마감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해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사형수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웃으며 사는 게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span></div>

<!-- paragraph:p0057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58 -->
<div><span>부디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자족하며 인내하며 늘 웃으며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 줄 확신하며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훗날 천국 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평소에 밝은 표정으로 사는 훈련, 미소 띤 얼굴로 사는 훈련, 웃으며 사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웃음의 나라인 천국에 가서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잘 적응하며 삽니다.</span></div>

<!-- paragraph:p0059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60 -->
<div><span>링컨은 자서전에서 사람은 누구나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그렇습니다. 특히 밝은 표정과 웃음, 미소에 대해 반드시 책임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코로나 정국 하에서도 이삭처럼 늘 이웃들과 웃음을 나누며 웃음에 자녀들로 사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span></div>

<!-- paragraph:p006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62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63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_L1VszjSgjs"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