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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11003m]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 (눅 10: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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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a href="http://thegreen.or.kr/./files/attach/images/59/655/059/8a92414099687f5bfa3e5151fe3a12d9.jpeg" class="image-placeholder">1003.jpeg</a></p>

<!-- paragraph:p0002 -->
<p> </p>

<!-- paragraph:p0003 -->
<p class="p1"> </p>

<!-- paragraph:p0004 -->
<p class="p1"><span class="s1">가정예배 기도문</span></p>

<!-- paragraph:p0005 -->
<p class="p2"> </p>

<!-- paragraph:p0006 -->
<p class="p1"><span class="s1"><span>주님,</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07 -->
<p class="p1"><span class="s1">어느덧 10월 첫 주일입니다.</span></p>

<!-- paragraph:p0008 -->
<p class="p1"><span class="s1">또 &lt;개천절&gt;이기도 한 이 아침, 역시 비대면 가정예배로 고개를 숙였습니다.</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1"><span class="s1"><span>성령으로 함께 하사 이 예배가 신령과 진정을 다하는 산제사가 되게 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10 -->
<p class="p1"><span class="s1">4천 3백여 년 전 이 땅 위에 저 하늘을 여사 저희 민족의 개국을 허락하신 것처럼 오늘도 저희 위에 하늘 문을 활짝 여사 하늘의 아름다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시옵소서.</span></p>

<!-- paragraph:p0011 -->
<p class="p2"> </p>

<!-- paragraph:p0012 -->
<p class="p1"><span class="s1"><span>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위로하시며 안수해주시고, 오늘도 주일 가정예배가 여의치 않은 성도들을 기억하사 그 사정과 형편을 돌아보시며 더욱 큰 믿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13 -->
<p class="p2"> </p>

<!-- paragraph:p0014 -->
<p class="p1"><span class="s1">주님,</span></p>

<!-- paragraph:p0015 -->
<p class="p1"><span class="s1"><span>하루 속히 이 &lt;코로나19&gt;를 극복하고 저희 사회도 교회도 모두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할</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수 있게 하시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단단하게 알차게 도약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해주시옵소서.</span></span></p>

<!-- paragraph:p0016 -->
<p class="p2"> </p>

<!-- paragraph:p0017 -->
<p class="p1"><span class="s1">오늘도 이 가정예배를 통해 모두가 주님의 육성을 듣고 바르게 응답하며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span></p>

<!-- paragraph:p0018 -->
<p class="p2"> </p>

<!-- paragraph:p0019 -->
<p class="p1"><span class="s1"><span>언제나 주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하늘의 보고를 여사 만복을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p>

<!-- paragraph:p0020 -->
<p> </p>

 

<!-- paragraph:p0021 -->
<p> </p>

<!-- paragraph:p0022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C67GtfLKf7c" title="미디어 원본"></a></span>


<!-- paragraph:p0023 -->
<p class="p1"> </p>

<!-- paragraph:p0024 -->
<p class="p1"> </p>

<!-- paragraph:p0025 -->
<p class="p1"><span>20211003m</span></p>

<!-- paragraph:p0026 -->
<p class="p1"><span>눅 10:29-37</span></p>

<!-- paragraph:p0027 -->
<p class="p1"><span>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span></p>

<!-- paragraph:p0028 -->
<p class="p2"> </p>

<!-- paragraph:p0029 -->
<p class="p1"><span>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span></p>

<!-- paragraph:p0030 -->
<p class="p2"> </p>

<!-- paragraph:p0031 -->
<p class="p2"> </p>

<!-- paragraph:p0032 -->
<p class="p1"><span>본문은 유명한 주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span></p>

<!-- paragraph:p0033 -->
<p class="p1"><span>우선 29절을 보면 한 율법사가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굽니까 하고 묻습니다. 앞에서 주님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자, 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 율법 선생이 그렇게 되물은 건데, 이 10장 25절과 본문 29절을 보면, 그가 주님을 시험하고 또 자기를 잘 보이게 하려고 잘난 체 하려고 그렇게 이웃에 대한 개념, 이웃에 대한 정의를 주님께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에 대해 율법 박사답게 이론적으로 개념적으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접근한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4 -->
<p class="p2"> </p>

<!-- paragraph:p0035 -->
<p class="p1"><span>그런데 주님은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제일 마지막 37절을 보십시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 이웃이 누군데요, 이웃이 뭔데요 하며 말장난 하지 말고 내가 소개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너도 가서 그렇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이란 무슨 말이나 이론이나 개념이나 신학이나 교리나 사변이나 관념이 아니고 행함이라는 겁니다. 실천이라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6 -->
<p class="p2"> </p>

<!-- paragraph:p0037 -->
<p class="p1"><span>그렇다면 주님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모범으로 모델로 제시하시며 너도 가서 이 같이 하라고 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한번 보겠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38 -->
<p class="p1"><span>어거스틴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을 뜻하고, 여리고는 세속 도성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강도는 마귀를 뜻하고,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은 마귀의 미혹으로 죄에 빠져 영적으로 죽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는 곧 율법과 유대교를 상징하고, 그들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갔다는 것은 율법과 유대교는 결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시한다고 했습니다. 또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은 곧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겁니다. 또 그가 기름과 포도주로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씻고 싸맸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치유를 뜻하고, 또 주막은 교회를, 주막 주인은 목회자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돌아올 때라고 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돌아와서 갚겠다고 한 것은 재림 후에 있을 주님의 보상과 상급을 뜻한다고 주석했습니다.</span></p>

<!-- paragraph:p0039 -->
<p class="p2"> </p>

<!-- paragraph:p0040 -->
<p class="p1"><span>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의 마지막 결론인 너도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는 당부입니다. 더 이상 내 이웃이 누군데요, 이웃이 뭔데요 하며 빈정대지 말고 너도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 사랑을 네 몸으로 실천하라는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1 -->
<p class="p2"> </p>

<!-- paragraph:p0042 -->
<p class="p1"><span>실제로 이웃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행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고 자꾸만 내 이웃이 누굽니까, 사랑이 뭡니까 하며 도피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닥치고 가서 이제 실천하라고 하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3 -->
<p class="p2"> </p>

<!-- paragraph:p0044 -->
<p class="p1"><span>본문 30절 이하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까지 벗겨가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그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천만 다행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사장이니까 목사니까 당연히 그 사람을 구해주지 않겠습니까?</span></p>

<!-- paragraph:p0045 -->
<p class="p2"> </p>

<!-- paragraph:p0046 -->
<p class="p1"><span>그러나 예상을 깨고 제사장은 그를 보자마자 도리어 급히 피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다시 레위인이 나타났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과 같은 지파인 성직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과 함께 백성들의 예배를 돕고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까 제사장 목사는 바빠서 그냥 지나쳤다고 해도 이번에 등장한 레위는 당연히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겠죠.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의 기대는 무참하게 깨집니다. 그 레위인마저도 결국은 그냥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이게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희생적으로 강도 만난 이웃을 돕고 구해줘야 할 사람들이 이렇게 다 피해 달아났습니다.</span></p>

<!-- paragraph:p0047 -->
<p class="p2"> </p>

<!-- paragraph:p0048 -->
<p class="p1"><span>주님은 여기서 당시 종교 지도자 성직자들의 위선과 외식을 가차 없이 비판하며 고발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실화가 아니라 주님의 창작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키시고 그들이 다 강도 만난 자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달아났다고 스토리텔링을 하신 것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원색적인 비판이라고 봐야 옳습니다. </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49 -->
<p class="p2"> </p>

<!-- paragraph:p0050 -->
<p class="p1"><span>그런데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인물이 등장합니다. 누굽니까?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사마리아인도 원래는 유대인인데 이방인과 피를 섞었다고 해서, 잡혼을 했다고 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개라고 부른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1 -->
<p class="p2"> </p>

<!-- paragraph:p0052 -->
<p class="p1"><span>그럼에도 주님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그토록 멸시하고 증오하는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켜 오히려 정통 유대인 성직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무색하게 하시며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본문 34절 이하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며 응급처치를 하고, 또 자기 나귀에 태워서 주말까지 가서 밤새 돌보며 치료하다가 이튿날 주인에게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 이 사람이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또 상처가 아물 때까지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반드시 지불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끝까지 간병을 잘 해달라며 부탁을 하고 가던 길을 다시 갔다는 거예요.</span></p>

<!-- paragraph:p0053 -->
<p class="p2"> </p>

<!-- paragraph:p0054 -->
<p class="p1"><span>여러분,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째서 그 강도 만난 자를 피해 달아났고, 또 이 사마리아인은 어째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그토록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구할 수 있었을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5 -->
<p class="p1"><span>우선 제사장과 레위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설교하고 백성들을 가르친 것과는 달리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자칫 자기도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미친 듯이 달아난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 비겁했고 말 다르고 행동 다르고 속 다른 위선자들이었고 또 회칠한 무덤처럼 철저한 외식자들이었다는 것이 당시 주님의 고발이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6 -->
<p class="p2"> </p>

<!-- paragraph:p0057 -->
<p class="p1"><span>물론 그들도 할 말이 없진 않았을 겁니다. 내가 저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려면, 시간도 필요하고, 돈도 있어야 하는데 당시 내 수중에는 돈도 없고 또 빨리 가서 성전에 예배를 집례해야 했기 때문에 거기서 지체할 수 없었다고 자기 행위를 합리화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도 우선이라고 하십니다. 그 외에는 다 변명이고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58 -->
<p class="p2"> </p>

<!-- paragraph:p0059 -->
<p class="p1"><span>반면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가 거기에 이르러 강도 만난 자를 보자 즉각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그를 치료해 줬다고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는 순간 다른 무슨 복잡한 생각을 하거나, 계산을 하거나, 무슨 잔머리를 굴리기 전에 가장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발동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나 이 본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한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을 내가 돕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발동해야지 거기에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나 계산을 앞세우면, 그는 결코 남을 구하거나 도울 수 없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0 -->
<p class="p2"> </p>

<!-- paragraph:p0061 -->
<p class="p1"><span>생각해 보십시오.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었다면 거의 틀림없이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과는 원수지간 아닙니까. 따라서 그때 이 사마리아인이 측은지심이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혹은 지역 감정 같은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혔다면, 과연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내게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손해가 될 텐데 하며 계산을 하거나, 아니면 여기서 얼쩡대다 나까지 당할 텐데 하는 비겁한 마음을 품었다면 과연 그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런 생각보다, 어떤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편견보다, 이해타산보다 무조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살려야겠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그렇게 팔을 걷어붙인 겁니다. 만약 그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강도 만난 유대인은 결국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았을 겁니다.</span></p>

<!-- paragraph:p0062 -->
<p class="p2"> </p>

<!-- paragraph:p0063 -->
<p class="p1"><span>그러니 보십시오. 이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얼마나 헌신적이고 책임적이었습니까?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의 강도 만난 이웃을 대신 태우고 주막까지 가서 밤새껏 정성으로 치료를 해주고, 또 주막 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치료를 부탁하고 앞으로 비용이 더 발생하면 자기가 돌아올 때 꼭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떠나지 않았습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4 -->
<p class="p2"><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65 -->
<p class="p1"><span>여러분, 강도 만난 이웃은 이렇게 돕는 겁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계산하지 않고,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돕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우리가 왜 꼭 그래야만 옳을까요?</span></p>

<!-- paragraph:p0066 -->
<p class="p2"> </p>

<!-- paragraph:p0067 -->
<p class="p1"><span>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해석처럼 우리는 다 사탄이라는 강도에게 당하고 버려져 죽어가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엄청난 희생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시며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주막에다 맡기셨습니다. 당신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를 교회에 맡기사 주막 주인인 목회자들로 하여금 계속 치유하며 돌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기름과 포도주로,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강도에게 당한 아픈 상처를 치유하며 주막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 재림하실 주님을 고대하며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span></p>

<!-- paragraph:p0068 -->
<p class="p2"> </p>

<!-- paragraph:p0069 -->
<p class="p1"><span>그런데 이렇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냥 맥을 놓고 앉아서 하염없이 주님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주변의 이웃들이야 강도를 만나 죽어가든 말든 그건 내 알바 아니라며 눈을 감거나 혹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나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서는 절대 안 되고,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합니까? 주님이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그대로, 필히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span></p>

<!-- paragraph:p0070 -->
<p class="p2"> </p>

<!-- paragraph:p0071 -->
<p class="p1"><span>지금 우리는 모두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강도를 만나 지구촌 전체가 큰 상처를 입고 지금도 수많은 이웃들이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계산하지 말고, 선입견이나 편견 갖지 말고, 나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갖지 말고, 도리어 측은지심을 발동하고, 희생을 무릅쓰고 손해를 감수하며 나보다 더 심하고 나보다 더 아프고 나보다 더 고통 받는 이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span></p>

<!-- paragraph:p0072 -->
<p class="p2"> </p>

<!-- paragraph:p0073 -->
<p class="p1"><span>우리는 지금 나도 어렵다는 이유로 거의 남 생각, 이웃 생각을 못하며 삽니다. 그저 모든 것을 코로나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마음에 아무런 불편도 못 느끼며 삽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내가 강도 만난 너희를 구해준 것처럼 너희도 가서 그렇게 살아라, 사심 없이 사랑을 실천해라, 비용이 발생하고 치료비가 더 들면 내가 훗날 돌아올 때 다 갚고 이자까지도 다 지불하마 그러십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74 -->
<p class="p2"> </p>

<!-- paragraph:p0075 -->
<p class="p1"><span>여러분,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지도자들, 정치인들 믿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미 그들의 위선과 모순과 표리부동한 외식을 고발하시며 그들 말고 너희가 가서 돕고 구하고 기도하고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절적으로도 지금은 연말을 향해 가는 10월입니다. 그동안 잊고 지내온 내 주변의 이웃들, 강도 만난 사람들을 좀 더 생각하시며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