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210808m] 상한 갈대 (사 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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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저희들 오늘도 교회가 아니라 가정에서 이렇게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조촐하나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코로나19>가 여전히 지구촌 모든 나라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저희마저도 이토록 힘들고 불안해하고 있사오니 하루 속히 주님이 그 기세를 꺾어 주시고, 백신을 통해 더 이상의 확산을 막아주시며 마침내는 완전히 퇴치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로 하여금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 교회로 돌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위로해주시고 안수해주시옵소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통하며 기도하는 가정들의 간구를 응답해주시옵소서.

특히 코로나 정국 속에서 경제적으로 큰 아픔을 겪으며,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가정에 은혜를 베푸사 그 딱한 문제들을 신속히 해결하시고 수습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주님의 육성을 듣게하시고, 말씀 앞에서 결단하며 주님 주시는 위로와 큰 힘을 얻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808m

사 42:1-4

상한 갈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는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프랑스의 유명한 물리학자요 수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이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기 위해 쓴 <팡세>라는 책이 있지요. <생각>이라는 뜻인 그 <팡세>는 논문이 아니라 천여 편의 짧은 글들을 모아서 편집한 에세이집입니다. 파스칼이 거기서 우리 인생을 뭐라고 했습니까?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지요. 인생이란,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고 쓰러지는 나약한 갈대 같은 존재지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유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만물 중에서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중국을 소재로 쓴 소설 <대지>로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여류소설가 펄벅의 작품 중에는 우리 한국을 소재로 쓴 소설도 있습니다. 제목이 뭡니까? <살아있는 갈대>입니다. 펄벅은 미국 장로교회가 중국으로 파송한 선교사의 딸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중국을 하나의 단어로 <대지>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말도 참 적절하지만, 우리나라를 <갈대>라고 한 것도 옳은 생각이었습니다. 더구나 <살아 있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열강들 틈에서 늘 흔들리며 가장 나약하고 가장 불안정하고 가장 위태로운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질긴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기적같이 살아가고 있는 민족, 그래서 우리를 <갈대>라고 한 겁니다. 얼마나 문학의 대가다운 표현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오늘 본문은 우리 인생을 뭐라고 했죠?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도 대단한 통찰이고, 펄벅의 살아있는 갈대도 참 공감이 가는 말이지만, 성경의 말씀하는 이 상한 갈대야말로 훨씬 더 리얼하고 진솔하고 더 적나라하고 더 극명한 표현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 갈대만 해도 이미 나약한데 그게 또 상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딱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상한 갈대 외에도 또 하나 문학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게 뭡니까? 꺼져 가는 심지입니다. 옛날 등잔불 기억하시죠? 지금 50대 이상 되신 분들은 아마 어릴 때 시골에서 다 호롱이나 남포를 사용해보셨을 겁니다. 호롱에 기름이 남아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기름이 다 마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부터는 심지가 타면서 불이 가물가물 꺼져 갑니다. 그러면 빨리 호롱에 기름을 다시 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불이 꺼지면서 연기와 냄새가 진동을 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다 그런 상한 갈대고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게 뭡니까? 우리가 다 그렇게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지만, 주님이 우리의 그런 삶을 우리의 그런 생명을 함부로 꺾거나 끄시지 않는 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참 비정한 곳이죠.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는 절대 용납하지 않고 가차 없이 도태시키는 정글의 한복판입니다. 상한 갈대를 싸매거나 꺼져가는 등불을 되살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의 그런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기어이 그 불씨를 끄려고 하는 살벌한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시지 않고,  기어이 다시 고치시고 회복시켜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새 출발을 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널부러져 있던 38년 된 환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야말로 꺼지기 직전의 가물거리는 심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가족들마저도 포기한 지가 오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기어이 그를 찾아가사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지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면서 새 출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렇게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상하고 아무리 꺼져가는 등불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직 살아 있는 한,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 이야기.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됐으니까요. 그야말로 사면초가고 일촉즉발의 위기입니다. 꼼짝없이 훅 하고 꺼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분노한 군중들을 향해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극적으로 그 여인을 구해내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절대 흔들리고 있는 지금 내 모습, 꺼져가는 지금의 내 처지가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보시되 언제나 미래의 빛 앞에서, 희망의 빛 앞에서, 무한한 가능성의 빛 앞에서 보시기 때문에, 지금 내가 좀 상했다고, 지금 내 생명이 좀 흔들린다고, 내 건강이 흔들리고, 내 사업이 흔들리고, 내 인생이 좀 흔들린다고, 그게 곧 나의 모든 것이라고 판단하시거나 단정하시지 않습니다. 어제나 혹은 오늘은 죄를 지었을망정, 내일은 또 누구보다도 경건하게 순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든 오늘의 모습으로 그 사람 그 생명의 불을 꺼서는 안 된다는 주의십니다. 실제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오늘은 간음한 여인이었지만 내일은 다시 위대한 성녀가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등불 도 끄지 않으시고 지금의 모습이나 간음하고 실수한 모습만으로 나를 판단하시지 않고 여전히 가능성의 존재로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고 내일이 있는 존재로 평가해주시는 주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라.” 마태복음 12장 21절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앙망하라, 하나님을 바라라. 여러분, 이 코로나 시대에 세상에서 상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가물거리며 꺼질 듯 위태롭지 않은 사람이 없는 이 팬데킥 시대에는 우리가 다 주님남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손에 손에 돌을 들고 나를 비난하며 치려할 때도 끝까지 나를 지키시며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믿어주시고 나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장해주시는 주님만을 앙망해야 합니다. 세상을 믿지 마십시오.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살 길이고,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욥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로 말하면 역사상 욥보다 더 처절한 인생은 없었을 겁니다. 7남 3녀의 멀쩡한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한자리에서 태풍에 집이 무너져 몰살을 당합니다. 그 많던 재산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몸이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온몸에 난 종기를 기왓장으로 긁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하라며 악을 쓰다 가출해버렸습니다. 친구라는 사람들은 그를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 계속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려댔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절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했습니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으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어 가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 저는 더 이상 불만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하며 끝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꺾이고 상해서 가물가물 꺼져가던 그의 인생이 갑절의 축복과 생명으로 완전히 거듭났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제게는 이 말씀처럼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게 분명 선한 일이고, 예수를 믿는 일이고, 교회를 돌보는 사역인데도 사이다가 튀듯 상큼하기는커녕 늘 피곤하다고 합니다. 꺼질 듯 꺼질 듯 가물거리며 늘 낙심이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고 또 뭐라고 했습니까?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둔다고 합니다. 상했다고 꺼져 간다고 꺾어버리시거나 훅 불어서 꺼버리지 않고 결국은 가물거리는 불씨를 되살려서 때가 되면 반드시 풍성한 수확을 보게 하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여러분, 이게 지금 불신자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도, 예수 믿는 사람도 주홍 같은 죄, 진홍 같은 죄를 범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죄 지었다고 우리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시지 않고, 오라 내가 너희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해서 새 출발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요즘 우리의 삶이 너무 황폐해졌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처지와 삶의 질이 급격히 추락해서 그야말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같은 형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너무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절대 상했다고 꺾어버리거나 꺼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반드시 우리를 이 철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지시고 구하셔서 새 출발하게 하시고, 또 때가 되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또 욥처럼 갑절의 아름다운 축복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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