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608m: 칼과 무저항(마 26:47-52) 순교자기념주일

2008년 6월 8일 주일낮예배/순교자기념주일
본문: 마 26:47-52
제목: 칼과 무저항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오늘은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순교자들의 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듯이 313년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해방령인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참혹했습니다. 로마의 10대 박해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지상에서 기독교가 박멸되었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자 지하에 있던 신자들이 나옵니다. 카타콤의 신자들입니다. 당시에 얼마나 신자들이 많이 순교했습니까?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순교와 불가분리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순교를 피해서 그렇지 본래는 순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믿으면 순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죽어야 산다고 했고,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야만 결실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비폭력, 무저항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진수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기독교의 신앙은 순교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내용은 주님이 골고다에서 체포되시는 장면입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돈을 받고 스승을 판 제자가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주님이 기도하시는 동산에 나타나 배신의 키스를 합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단숨에 주님을 체포합니다. 제자들이 다 달아났는데 베드로가 남아 차고 있던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려칩니다. 여러분은 이 베드로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잘 했습니까? 잘못 했습니까? 베드로의 행동이 폭력입니까? 정당방위입니까?

아마 누구도 베드로의 이런 태도를 잘못이라고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스승을 지키는 충정이기 때문입니다. 무고한 자의 실존적 저항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을 누가복음에서 보면,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이 말씀을 하십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도 주님은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이 실수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의 평소 소신을 이 최후의 순간까지 관철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른 뺨치면 왼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정당방위인데도, 실존적인 자기방어인데도 주님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전 세계는 칼을 휘두르며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와 보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주님은 그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너무 비현실적입니까? 너무 감상적입니까?

주님이 칼을 도로 꽂으라는 이 말씀은 평온할 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상대가 내게 칼을 빼들고 목을 겨눌 때 하신 말씀입니다. 평안할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원수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상주의자의 말이 아닙니다. 가장 치열한 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산상보훈을 보면 처음에는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고,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고...... 그러다가 마침내 절대 보복하지 말라, 원수도 용납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쯤되면 사람들이 산상보훈을 다 떠납니다. 원수사랑을 가르친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어떤 전쟁보다 더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했고, 감미로운 산상보훈을 갖고 있는데, 기독교가 가장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산상보훈을 비웃고 배신한 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악한 사람과 타협하거나 불의에 대해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입니다. 주님은 절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끝내 그들과 맞닥뜨렸습니다. 때리면 맞으며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칼을 도로 꽂으라는 말씀은 이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주님의 삶이고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야 합니까? 주님은 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52절 하반절처럼 ‘칼을 쓰는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칼을 부르고, 보복은 보복을 부르기 때문에 칼의 악순환이 모두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보복행위를 높이 사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모의 원수나 한 집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보복하는 것을 아무런 위기감 없이 봅니다. 복수는 반드시 복수를 낳습니다. 요즘은 아무도 참지를 않습니다. 아무도 남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참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 감정과 분노대로 칼을 빼들고 휘두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칼을 쓰면 칼로 망합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장면을 보면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정당방위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정당방위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서는 어떤 폭력도 어떤 명분의 전쟁도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보복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근본적으로 칼을 부정하셨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총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 군대로 안 가고 감옥으로 갑니다. 총이란 살인의 도구니까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 집총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주님도 칼과 총을 부정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맹목적 무저항이나 비폭력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주님이 제자를 세상에 내보내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러 갈 때 칼 하나를 품고가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기 직전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는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시고, 그 산에 오르기 직전에는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칼 자체를 부정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칼을 버리거나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집총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만 칼입니다. 그렇지 않고 뽑히면 더 이상 칼이 아니라 살인의 도구가 됩니다. 칼이 칼집에 있을 때만 정의와 위엄과 신념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칼의 생리와 운명은 한 번 뽑히면 절대 다시 곱게 꽂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칼의 비극입니다. 왜냐면 그 칼에 희생된 사람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로 피를 본 사람은 그 칼을 도로 꽂지 못합니다. 그래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은 갖지만 칼집에서 뽑지는 말라는 겁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한 정의와 권위는 갖 돼,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는 겁니다. 칼을 살인의 도구로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툭하면 칼을 뽑는 사람은 약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칼을 뽑지 않는 사람이 강자입니다. 무서워하는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마구 휘두릅니다. 지금 피묻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지 못해 불안에 떨고 있는 분 없으십니까?

왜 우리가 칼을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자기 희생이 싫어서입니다. 자기는 수난 당하기 싫고, 손해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도로 칼집에 칼을 꽂으라는 것은 수난과 순교를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칼의 힘을 믿는 세상, 칼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면서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무장해제를 결단한다는 것,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희생하고 죽으라는 겁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이고, 결실을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순교의 복음이고, 기독교 신앙은 순교의 신앙입니다. 죽어야 살고,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가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 주님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고, 순교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결단하기 어렵습니다. 순교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산 순교자로 사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주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이것이 앞선 순교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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