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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10704m] 항상 감사 (살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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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span>20210704m</span></p>
<!-- paragraph:p0002 -->
<p class="p1"><span>살후 2:13-17</span></p>
<!-- paragraph:p0003 -->
<p class="p1"><span>항상 감사</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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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span>(살후 2:13-17, 개정)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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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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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8 -->
<p class="p1"><span>본문 13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입니다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처럼 항상 감사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감사가 신앙의 본질이고,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바울이 말했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이 어떻게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까? 맥추감사절이나 가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 때 한두 번 감사하는 것이야 누구나 그럴 수 있다지만, 어떻게 살면서 항상 감사할 수 있을까요?</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2"><br></p>
<!-- paragraph:p0010 -->
<p class="p1"><span>올해만 해도 우리는 감사한 일보다는 우울한 일, 슬픈 일, 억울한 일, 짜증나는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들 몸과 마음이 잔뜩 지쳐있는데, 감사가 무슨 말입니까? 당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항상 감사하란 말인가? 이것이 무슨 터무니없는 이상주의고 낙관주의냐며 항상 감사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1 -->
<p class="p2"><br></p>
<!-- paragraph:p0012 -->
<p class="p1"><span>13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이것이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근거로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남보다 더 낫고 착하고, 남보다 더 잘 나서, 더 주님을 사랑하고 잘 믿고, 기도도 더 많이 해서, 그 모든 것을 합산한 최종 점수가 더 높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바울이 말한 처음은 태초를 의미합니다. 아니 태초 이전, 창세 이전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이하입니다. “곧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처음부터 우리를 택해주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믿음, 기도, 회개,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원초적 감사의 근거라며,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3 -->
<p class="p2"><br></p>
<!-- paragraph:p0014 -->
<p class="p1"><span>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사건에는 그 어떤 조건이나 자격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공동 합작이 아닙니다.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지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붙잡고 살면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을 생각하며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옳고, 그것이 올바른 도리라는 것이 바울의 역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하니까, 바울은 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천후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5 -->
<p class="p2"><br></p>
<!-- paragraph:p0016 -->
<p class="p1"><span>13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총이 우리 감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성령으로 우리를 관리하십니다.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거룩하게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선택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최대 과제이자 지상 목표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장차 갈 천국이 거룩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천군천사가 다 거룩합니다. 24장로가 다 거룩합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의 네 생물도 거룩하고, 앞서 간 성도들이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흰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상징적 뜻입니다. 천군천사가 늘 찬송하는 가사가 거룩하다 거룩하다입니다. 우리가 장차 그 세계에 갈 사람이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갔을 때 문화적 충격이나 정서적 이질감을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천국에 가면 그 세계에 쉽게 적응합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복된 완전한 세계입니다. 그곳은 아픔이나 슬픔이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입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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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8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span>그럼에도 우리는 그 좋다는 천국에 빨리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에 있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은 영원한 낙원인데, 왜 천국 가기를 부담스러워할까요? 왜 최대한 버티다 가려고 할까요? 일단 만에 하나 천국이 없다거나, 지옥에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삶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직 주님 앞에 설 준비가 안 되었다는 영적 불안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겠지만 당장 죽어서 갈 자신은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내가 아직 성화가 덜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내가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지만, 최대한 이 땅에 더 두시는 이유는 우리의 성화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말미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성화된 다음에 천국에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요 바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더 두시는 선하신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가 우리의 성화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많이 성화된 사람은 그만큼 영화를 누립니다. 각자의 성화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으로 곧장 인도하지 않고, 무려 40년간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린 이유도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의 때를 벗고 들어가라는 조치였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성화된 뒤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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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0 -->
<p class="p1"><span>그런데 창세 전에 이루어진 선택은 그 주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성화는 그 주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성화의 주체입니다. 성화는 내가 노력하고 결단하면서 이루어야 합니다. 내가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열심히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경건생활, 영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성화는 내가 결단하고 노력하고 희생해야 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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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2 -->
<p class="p1"><span>그런데 이론상으로는 그것이 맞습니다. 성화의 주체가 분명 내 자신입니다. 그러나 그 성화조차도 사실상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합니다. 본문 13절 하반절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거룩해져야 하는데, 그 일 조차도 성령이 내게 힘을 실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인 바로 오늘 맥추감사절에 강림하셨던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품성을 닮는 일이 꼭 필요하다. 자제하라. 말씀을 가까이 하라. 선하게 살아라. 도우며 살아라.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라. 성령이 부단히 우리 안에서 그런 깨달음과 자극을 주십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와 계시에 바르게 응답을 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실에 우리가 감사하며 살아야 옳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 사실을 늘 깨달으며 감사하면서 살면, 얼마든지 우리가 항상 감사하며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망각하고 외면해서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돕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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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4 -->
<p class="p1"><span>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는 벌써 올해 상반기를 살았습니다만, 우리의 삶의 환경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하반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위로하셨고, 기도할 때 희망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로 우리로 하여금 안도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다 기만이고 헛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더 깊은 공허뿐이지만, 하나님의 주시는 소망은 우리 삶에 큰 용기와 격려가 됩니다. 흔히 우리는 강한 척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 울며 삽니다. 신음하며 삽니다. 얼마나 자주 위기에 몰리고, 절망감과 좌절감으로 흔들립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위로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주님이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5 -->
<p class="p2"><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span>시편 90편은 모세의 시입니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숱한 역경의 삶을 살며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모세의 결론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7 -->
<p class="p2"><br></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세상은 늘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영원한 소망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결국은 이기게 하십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통해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옳은 이 세 가지 은혜를 늘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감사함으로 평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9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30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31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Wn7r8akWNiQ"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