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너머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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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고, 달도 벌써 한 해의 절반을 훌쩍 넘겼지만 마스크의 세월은 여전합니다.
감소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전파력이 더 강한 <델타 변이>, <델타 플러스 변이>가 확산하면서 <코로나19>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성인 84%가 백신 1차 접종(2차 접종 61.2%)를 마쳤다는 영국은 지난 2월 이후 가장 많은 확진자들이 쏟아져 다시 방역의 고삐를 죄고 있고, 그간 최고의 백신 접종률을 자랑하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한 번 풀린 긴장을 다시 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제는 몸이 더는 견디기 힘들어 하는 어떤 임계점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피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좀 더 참지...> 하면서도 막상 본인에게는 관대할 수밖에 없는 인지상정의 상황도 그렇고, 여전히 나 외에는 모두가 코로나 보균자처럼 느껴지는 불신의 벽 또한 언제 극복될지 잘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고장난 LP판처럼 요즘도 하루 몇 차례씩 반복되는 안전 문자 역시 꼭 필요한 공지건만 그닥 반갑지 않고, 우린 어느새 <가린 얼굴>에도 몹시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집에서도, 차에서도, 혼자 있는 공간에서도 맨 얼굴은 뭔가 좀 어색하고 허전하고, 오히려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 안도감마저 생기니 이러다 정말 코로나가 끝나도 계속 쓰고 살게 되지 않을까 할 정도입니다.
사실 다 마스크를 하고 있으면 눈만 보이지 표정은 읽을 수가 없어 대화가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스크 안의 표정까지도 다 읽고 느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주고받던 악수마저도 지금은 무슨 격투기 선수들처럼 주먹 박치기로 대신하고 있지만 이런 생경한 문화조차도 어느덧 낯설지 않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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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어느 여름 밤, 독일 뮌헨대학 뒤편으로 길게 펼쳐진 <엥글리쉬 가르텐>(영국식 공원)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금세기 가장 화려하고 위대한 테너 중 하나로 꼽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혼을 울리는 야외 공연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오, 솔레 미오>와 푸치니의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운 아리아 <별이 빛나건만>을 부를 때는 아예 더위조차도 저만치 물러가고 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이 쏟아지며 마치 나폴리 항의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상쾌함과 황홀함까지 느껴졌습니다. 엄숙한 실내 극장과는 달리 그날 그 <엥글리쉬 가르텐>에는 그 누구도 억누를 수 없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모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행복에 겨워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마스크를 하면 어떻습니까? 더욱 음악이며 그림 같은 예술이나 자연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야 이 와중에도 작은 여유나마 누릴 수 있습니다.
우수, 불안, 절망 속에서 헤어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며 끝까지 순수한 절대 신앙을 지키려 사투를 벌였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유명했으나 실존주의가 다시 퇴조를 보이며 잊혀져 간 고독한 단독자였습니다.
키엘케고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구별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은 반드시 감사에서 온다고 역설했습니다. 해산은 고통스럽지 결코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다고 <기쁨>마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7월 초순 현재 마스크 너머로 본 세계는 여전히 우울한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합시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감사하는 삶에 진정한 보람과 뽀송뽀송한 기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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