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7m] 여호와 샬롬 (삿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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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7m
삿 6:24
여호와 샬롬
(삿 6:24, 개정)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성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소개한 사사기 6장 24절에 나오는 ‘여호와 샬롬’,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신약 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에 달려 자기 육체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사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주님이 바로 우리의 평화시라는 고백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는 성령을 평화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평화시고, 주님이 막힌 담을 허신 평화, 성령도 평화의 영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평화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당연히 평화를 사랑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peace mak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평화하게 하는 자가 바로 peace maker입니다. 그는 평화를 도모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들의 헬라어 원뜻은 자녀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children of God, 독어 성경은 Gottes Kinder라고 번역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그가 남자든 여자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가 다 평화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앞으로 평화를 추구하며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샬롬이나 신약의 에이레네라는 말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적 개념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평화라는 개념은 반드시 누구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고 의미 있는 개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관계는 대체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가 평화를 논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물어야 할까요?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리 평화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화하면 다른 모든 관계도 다 불편하고 갈등관계로 전락하고 맙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아담의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니라 현재 너와 내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그가 범죄하자 마자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추적하시며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간관계도 망가집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여자가 선악과를 줘서 내가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냐를 물으시며 관계 회복을 촉구하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습니까? 만일 긴장관계에 있다면, 하나님이 계속 어디 있느냐고 묻고,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면, 빨리 관계를 개선합시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평화롭고 건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평안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면서 다른 모든 관계가 복 있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리 모든 관계, 평화의 첫 단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의 화해, 평화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의외로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늘 불화 가운데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회의, 미움 때문에 자학하고 저주하고 증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용납합시다. 자신과 화해합시다.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합시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야 합니다.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케 하는 자, 평화를 만드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이웃 사랑을 교훈하신 것이지만, 거기에는 먼저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사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 자신과의 평화, 화해가 이웃과의 평화에 전제이고 모범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면 이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전제가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셨는데, 왜 나는 아직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내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왜 나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날마다 미워하며 살아갈까요? 이제는 자신과 화해합시다. 그래야 남과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외면하지 맙시다. 그래야 이웃도 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이 수순은 잊지 맙시다. 자신과의 화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 없는 자신과의 진정한 화해는 없습니다. 이기적으로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한 것도 병이지만, 자기에게 혹독하고 냉정하면 절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주셨습니다. 부디 자신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임을 새삼 깨닫고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합시다. 긍정합시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반드시 평화를 누립시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거기에 평안과 행복이 있습니다.
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형제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형제나 이웃과 잘 지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 누구나 평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화평은커녕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화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를 알게 모르게 지배합니다. 이것이 문제고 불행입니다.
지난 삼위일체 주일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원래 한 분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칭호도 단수 El이 아니라 Elohim입니다. 완벽한 세 분입니다. 한 몸에 머리만 세 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세 분이 서로 간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존재하시기에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태초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며 오늘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공동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와 이웃과 공동체로 살 때만 진정한 인간입니다. 마치 삼위 하나님이 완벽한 한 분으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며 당신과의 관계를 확인하셨지만, 4장 9절에 가면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또 물으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것도 역시 가인의 위치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동생과의 관계가 어떠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가인이 되묻습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동생을 왜 제게 묻습니까? 하나님은 끊임없이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를 물으시며 당신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며 이웃과의 관계를 확인하십니다.
엊그제가 6.25 71주기였습니다. 우리는 71년간이나 남북이 마치 가인과 아벨, 야곱과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처럼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화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숙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 시대의 우리 민족의 평화를 위해 부름 받은 평화의 사도입니다. 우리는 아무 의식 없이 살지만 성서적으로 보자면, 우리에게 그런 중요한 과제,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peace maker입니다.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본질상 죄의 종이기에 그 어떤 말로 치장한다 해도 그들은 trouble maker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방기해서 그렇지 우리가 peace maker입니다. 한반도의 문제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식량과 물자를 보내고, 이산가족이 서로 만날 때, 인공기나 태극기를 달고 만납니까? 적십자 깃발입니다. 이 얼마나 계시적이고 상징적입니까? 부디 각자가 평화의 사도가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과도 평화하시고, 자신과도 화해하고, 이웃, 북한 동포와도 평화를 누려서 장차 천국에서도 평화를 누리며 사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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