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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0m]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20210620m

막 10:46-5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개정)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여리고 성의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한 번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누가 진정한 장애인인가 라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결코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소개한 본문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런 전제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은 장애인들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진단은 그렇습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구원과정을 짚어보겠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자신의 육체적 장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고,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병든 정신과 육체적 아픔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46절 이하입니다.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지나갔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 바디매오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어떤 호칭입니까? 나다나엘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다분히 주님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사람들은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도, 그는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눈 뜬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제대로 부를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록 맹인이고 거지였지만, 이미 주님을 알았고, 심지어는 주님을 바르게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주님에 대한 바른 호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믿음입니까? 주님도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당시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가 어떻게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여리고 성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구원을 호소했는지를 알 길은 없습니다. 어쨌든 바디매오는 예수를 메시아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제대로 주님을 제대로 믿고, 기도하고 있는지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해서 그날의 구복을 채우는 사람이 두 눈 멀쩡한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예수를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은 예수를 믿고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까. 그는 영의 눈이 열려 있었고, 영의 귀도 누구보다 분명하게 뚫려 있었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의 맹인이 어찌 바디매오 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디매오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직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만 응답하셨습니다. 바디매오만 주님을 확신하며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디매오에게서 배웁시다. 우리도 자신의 마음의 병을 인정하고, 여리고 사람들과 같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바디매오처럼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치유와 구원을 호소합시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를 구원해 주소서.” 주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며 구원을 선포하실 줄 믿습니다. 


물론 당시 바디매오가 믿음을 갖고서 부르짖었다 하여 당장에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나름 과정과 시련과 애로가 있었습니다. 본문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적은 사람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잠잠하라며 바디매오를 꾸짖고 자제시켰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앞서 가던 제자들이 그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주님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격려해야 할 제자들이 주님 앞으로 가려는 바디매오를 윽박지르며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회의에 빠지고, 시험에 들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돌아섭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주님 가까이에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나온 이들을 방해하고 해칩니다. 텃세를 부립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집니다.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 노릇을 합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사나 장로, 권사, 집사에게 다쳐서 교회를 떠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바디매오도 그런 현실에 직면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조용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그를 꾸짖고 통제하자 바디매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훼방을 겪으면 포기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48절을 다시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는 포기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의기소침해 기 죽지 않고, 오히려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먼저 온 사람들이나 주님 측근들의 방해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상대했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붙잡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그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향해 더욱 큰소리로 탄원했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실망하고 좌절해서 돌아서거나, 혹은 제자들을 붙잡고 따지고 싸움이라도 벌였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구나 그때 주님은 여리고에서 나가시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포기했다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리고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뵙고 여러분의 장애를 치유하고 싶으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주님의 선언을 듣고 싶으십니까? 지금 여리고 성에서 나가시는 주님을 놓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협조는커녕 오히려 가시와 마귀 노릇을 한다 해도 거기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야 주님이 여러분의 탄원을 들으십니다. 


드디어 주님이 바디매오의 탄원을 들으시고 발걸음을 멈추십니다(49절). 주님이 그를 부른다고 하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50절 말씀도 사실 우리를 많이 부끄럽게 하고, 또한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겉옷을 내버리고 앞 못 보는 맹인이 뛰어서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어도 좀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할 줄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방해물이 되어도 우리는 그것을 끝까지 안고 가려고 합니다. 바울도 회심하고 개종한 이후 자신의 과거 신분이며 화려한 모든 이력을 배설물처럼 내버렸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그것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손해를 보거나,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일을 우리는 못 참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바디매오에게서 겉옷이란 그의 재산목록 1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낮에는 옷, 밤에는 이불이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에게는 겉옷이 더욱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부르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뜁니다. 왜 그가 겉옷을 벗어던졌습니까?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걸 안고 뛰었을 터인데, 바디매오는 벗어던졌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 하여도 미련 없이 내버리고 뛰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양보하고 포기할 줄도 알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예수를 믿는 데 장애가 되면 과감히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마치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리듯이, 발에 채여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 생각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지듯이 그렇게 불이익이나 손해도 때로는 기꺼이 감수할 줄 알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노숙을 하는 거지 소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겉옷을 가차없이 내던지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디매오는 우리의 훌륭한 귀감입니다. 


바디매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51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확인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 제목 하나하나를 체크하시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하십니다. 


바디매오가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나 당연한 소원인 것 같습니다. 맹인이니까 보는 것이 절대적인 소원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얼마든지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재산 같은 것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항상 바르게 구하고 계십니까? 제대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함부로 응답하지 않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확인하시는데, 우리는 주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내게 유익하고 절실한 것을 아뢴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이하입니다. “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얼마나 정확한 지적입니까. 혹 간증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간절한 소원을 주님께 구하고 있는가? 그것이 과연 내게 유익한 것인가? 즉,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짚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거나 복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기도에는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응답입니다. 우리가 칼을 구한다 하여 주님이 칼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뿐만 아니라 바르게 기도해서 주님이 우리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듣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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