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3m] 한 알의 밀 (행 7:54-8:1)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210613m
행 7:54-8:1
한 알의 밀
(행 7:54-8:1, 개정)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세계 6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독일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Alte Pinakothek)에 가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스코렐(Jan van Scorel)의 전용관이 있습니다. 그는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인데 주로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모두 대작입니다. 그는 거의 실물 크기로 그립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그 크기가 100호에서 150호입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세례, 세 박사의 경배 등이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라는 그림도 명작으로 꼽힙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옛날에는 전시방 하나에 그림 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압도감이 듭니다. 그 큰 캔버스 한복판에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쪽에는 흥분한 유대인들이 손에 돌을 들고 당장이라도 스데반을 내려칠 기세고, 좌측 하단을 보면 귀족스런 겉옷을 걸친 사울이 오만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서 그 사건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무릎을 꿇은 하늘에는 주님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그 현장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영국 출신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였다면, 스데반은 2000년 그리스도교사의 첫 순교자입니다. 제가 늘 궁금한 부분은 이겁니다. 왜 스데반이 첫 순교자였을까 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하필이면 스데반을 제1호 순교자로 삼으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첫 순교자라면 당연히 사도들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최측근 중에서 나와야 체면도 서고, 격에도 맞을 것 같은데, 왜 제1호 순교자가 12사도가 아닌 7집사 가운데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로서는 성령 충만이나 지혜나 믿음이나 은혜나 권능으로 볼 때, 사도들 중에도 스데반 집사만큼 준비된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스데반만한 자격이나 소양을 지닌 사람이 없었기에, 주님은 그를 제1호 순교자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사도들 가운데서는 가룟 유다라는 첫 자살자가 나왔습니다. 다행히도 제2호 순교자는 사도 가운데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 이하입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장 8절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그리고 6장 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뿐만 아니라 그는 대단한 설교가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2-53절을 보면, 그는 당시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갑니다. 거기서 그는 심문을 당하면서 최후 진술 같은 긴 설교를 합니다. 그의 설교의 내용이나 기승전결은 가히 최고 수준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도 그리고 바울의 설교도 나오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그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이것이 학자들의 평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한창 선풍을 일으키며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을 회개시킬 때, 스데반은 산헤드린에 잡혀가서 탁월한 설교를 하고도 단 한 사람의 회심자도 얻지 못한 채 성 밖에 끌려 나가 죽습니다. 본문 55절 이하입니다.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주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을 차마 앉아 볼 수 없어 일어나 서서 내려다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마지막 59절과 60절도 보십시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린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런데 스데반도 주님의 기도와 같은 내용을 기도하고 죽습니다.
여러분, 뜻밖에도 스데반의 순교에 사도 바울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본문 58절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8장 1절 상반절도 보십시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라는 청년이 당시 스데반 처형에서 주동자였습니다. 사울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스데반을 살해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피를 본 후 더욱 날뛰며 그리스도교 박멸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8장 1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피난을 갔습니다. 사울이 너무 날뛰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십시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도행전 9장에 가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그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뵙고 전격 그리스도교로 전향합니다. 1절 이하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렇게 해서 가장 호전적인 유대교 전사 사울이 멸절시키려고 혈안이던 그리스도교로 개종합니다.
사울은 회심 후 가장 먼저 이름부터 바꿉니다. 그는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을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개명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큰 자로 살았고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작은 자로서 겸손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이 큰 자인 줄 알았는데, 주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보니 작은 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라고 했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오물처럼 내버린다고도 했습니다. 유대교 시절에는 극단적으로 교만했던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끝까지 겸손의 화신으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가 스데반을 죽인 전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다는 트라우마를 평생 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원죄만 생각하면, 그는 언제나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였습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은 바울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는데, 정작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도 순교했습니다. 그는 4년간 갇혀 있던 로마 감옥에서 끌려 나와 주후 67년 네로 황제 때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가 톨레 파운타나라는 형장으로 끌려 나가 대리석 기둥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형 집행관이 바울의 목을 자르자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져 공처럼 크게 세 번 튀었다고 합니다. 그의 머리가 튄 자리마다 샘이 솟았다 해서 지금도 그곳을 트레 폰타나, 세 개의 분수라고 부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시신은 루치나라는 귀족 출신 여성도가 수습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처형된 톨레 파운타나에는 지금 어마어마한 바울 순교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스데반이나 바울, 그리고 이후 수많은 순교자들을 하나님은 왜 참혹하게 순교라는 이름으로 죽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스데반만 해도 최소한 돌에 맞아 죽는 것만큼은 피하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무리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하고 표적과 이상에 능하다 해도, 남이 욕하면 욕을 받고, 돌을 던지면 맞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코 불행이나 치욕, 그리고 패배가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독한 역설이지만, 이기는 것이고, 영광이 되고, 영원한 생명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그대로지만, 썩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그를 멀쩡히 두시면 한 알 그대로이나, 참혹하게 썩으면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자 주님의 섭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아픔이나 상처, 심지어 병마와의 싸움조차도 어떤 의미로든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약이 되고 복이 되기에 하나님이 용납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수용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백해무익이라면, 하나님이 그것을 막아주시지 우리로 하여금 고스란히 당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비록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것은 헛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보십시오. 스데반의 죽음으로써 사도 바울이라는 걸출한 인물, 2000년 그리스도교사의 위대한 성자가 출현합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없었다면, 사울이라는 유대교 전사는 있었겠으나, 바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인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스데반은 초대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고, 2000년 교회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저는 곧 돌에 맞아 죽을 사람에게 하나님이 왜 그런 큰 능력과 기적을 주셨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능력이 필요했던 사람은 스데반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나 기적과 표적은 자기를 과시하고, 출세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리키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궁극적으로는 순교를 당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은 자기가 가진 재능과 은사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돌에 맞아 죽은 불행하고 아까운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값지게 죽은 사람,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장 성령이 충만할 때, 가장 지혜가 충만하고 얼굴이 천사처럼 빛날 때, 가장 훌륭한 설교를 막 마쳤을 때, 가장 영안이 열려 주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서신 것을 볼 때, 바로 그때 주님이 그를 낚아채듯 데려가십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스데반보다 더 아름답고 복 받은 사람, 더 위대한 최후를 맞은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순교자들을 생각합시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한 알의 밀알처럼 던져 우리로 하여금 백 배, 천 배, 만 배의 결실을 누리게 한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을 계승합시다. 또한 다음 세대에게 그들의 신앙을 전수합시다. 늘 순교 신앙, 십자가 신앙으로 승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