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영동고속도로 양지 톨게이트에서 빠져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약 4km 정도를 더 들어가면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좁은 길을 따라 500m 가량을 가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는 교부 터툴리안의 금언을 새긴 큰 표지석이 순례객들을 맞습니다.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 협회상>을 받기도 한 순교자 기념관은 아담하면서도 참 정갈할 뿐 아니라 다음 세대들에게 진정한 신앙을 가르치는 산 교육장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1989년 용인 금박산 자락에 개신교 20개 교단이 연합으로 건립한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은 그야말로 믿음의 선진들의 명예의 전당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 땅에서 발생한 개신교 최초의 순교 사건인 토마스 선교사의 대동강 사적이 대형 그림으로 형상화된 중앙홀에는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립니다. 자연 채광으로 자칫 무겁고도 음울할 수 있는 기념관 내부를 따뜻하게 연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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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기념관에는 253명의 순교자 존영과 유물,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며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백홍준 장로님을 비롯해 일제의 천황숭배를 거부하고 반대하다 7년간의 옥고 끝에 49세를 일기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 6.25 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결국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기풍, 문준경, 양용근, 신석구, 조만식 등 ...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개신교가 전파된 이래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증거하다 숨진 개신교 순교자는 모두 약 3천 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초기에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일제 때는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이라고, 또 6.25 때는 반공집단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던 성도들, 특히 일제 치하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순국지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선영과 유리 탁자 속에 보관된 손 때 묻은 유품들을 보노라면 지금도 당시 고문 받던 순교자들의 단발마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사실 그동안 우리는 한국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나 평가에 지나칠 정도로 인색했고 무심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손양원 목사님(1902-1950)의 경우입니다. 그분은 여순반란 사건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던 <사랑의 원자탄>이셨습니다. 또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수감됐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애국지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남 함안 출신으로 전남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사역한 희생적 목회자였으며, 6.25 때는 <제발 피신하시라!>는 주위 성도들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애양원 교회>를 지키다 결국 남하한 북한군에게 총살당한 순교자셨습니다. 손 목사님의 부친이신 손종일 장로님도 3.1 운동의 영남지역 지도자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습니다. 


따라서 국가적으로는 2대에 걸쳐 보훈처에 등록된 애국자 집안이요, 교회적으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순교자 집안인데 그런 손 목사님의 함안군 칠원면의 생가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신탕용 개 사육장으로 방치돼 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 모두를 한없이 부끄럽고 죄스럽게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생가 복원이 이루어져 기공예배까지 드리고 개신교의 성지가 되어 성도들의 순례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계기로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도 재평가 되고 새롭게 복원되기를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또 교회가 흔들릴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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