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보고 싶은 것만 보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만큼은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감정이 타인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꼭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마저도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조차도 실은 얼마든지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답은 바로 <확증 편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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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믿고 싶어 하는 것만 믿습니다. 이걸 심리학에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하는데, 똑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똑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만 사람마다 그 보고 들은 것이 같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을 수용하기 때문에 해석도 다 아전인수식입니다.

1960년대 이 용어를 처음 쓴 영국 런던 대학의 심리학자 왓슨(Peter Cathcart Wason) 교수는 확증 편향을 <진실 여부가 불확실한 가설을 일방적으로 강화하는 심리 현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증 편향자는 자신의 신념과 기대에 부합하는 정보나 지식은 기꺼이 수용하여 확대 재생산하지만 기대에 어긋나거나 자신의 신념에 반한 정보와 지식은 그게 아무리 객관적이고 올바르다 해도 가차 없이 배척하고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기어이 경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확증 편향은 일종의 자기기만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며 오직 자신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만을 인정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 색안경을 끼고 있지 않다고 믿으며 자기야말로 가장 공정한 맨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이런 확증 편향이 우리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숨어 암암리에 우리 모두를 지배하며 나의 가치관과 판단, 해석과 선택, 신앙을 전적으로 조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정치적, 이념적 확증 편향입니다. 우리나라 여야 정당들은 모두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이 확증 편향을 부추기며 프레임 효과를 극대화 합니다. 그 결과 정책이나 생산적인 토론은 실종되고 늘 어리석은 색깔론이나 이념 논쟁만 격화되는데 언론들은 이런 소모적인 싸움을 중재하거나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추깁니다. 그래서 상생의 정치는 사라지고 오직 <적과 동지>, <우리와 그들>이라는 진영 논리만 남아 <우리>는 무조건 옳고, <그들>은 무조건 틀린 족속으로 치부되는데 지금의 이념 갈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종교 갈등 등이 다 이런 비합리적이고도 무의식적인 확증 편향에서 온 것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중심에 늘 교회가 등장하는 모습도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툭하면 목사가 뉴스를 장식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절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점점 더 나쁜 사람들이 되어 갈까요?

늘 듣는 성경 말씀과 기도로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이 된 양 착각하여 자기 검열의 고삐를 놓친 건 아닐까요? 그래서 신자들은 이마에 커다란 뿔을 하나씩 달고 살면서도 정작 자기만은 그걸 모르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발 종교적 <확증 편향>에 갇히지 마시고, 이를 경계하는 바울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입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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