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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m] 성령세례 (행 11:15-18)

20210523m

행 11:15-18

성령세례


(행 11:15-18, 개정)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우리는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4세 미만 때 유아세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16세 이상이 되어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둘 중 하나의 세례를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물세례뿐 아니라 성령세례도 나옵니다. 여러분은 물세례도 성령세례도 다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성령세례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에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어야 받는다고 믿어서 지금도 성령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세례가 무엇입니까? 물세례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씻는다, 수장한다는 뜻입니다. 물로 씻는다는 것, 물속에 묻는다는 것은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를 물로 다 씻고, 죄인으로 살던 옛 사람을 물속에 수장시키고 거듭난다는 의미의 의식이 물세례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계통이나 침례교는 지금도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러나 장로교나 감리교, 가톨릭은 정수리에 물을 조금 바릅니다. 이것은 약식이지만 상징적으로 머리까지 물이 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례가 교회의 예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두 번 세례를 베풉니다만, 초대교회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언제 어디서나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면 즉각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복음을 듣고 죄를 고백하고 신앙을 고백하면 물 있는 데 가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회개와 신앙고백이 곧 물세례를 의미했습니다. 물세례는 기독교 입문을 뜻했습니다. 물세례만 받으면 자동으로 죄가 씻기고 중생한다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에게 교회가 그 사실을 공인해 주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계기로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새 사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도 있고, 물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거듭나 새 사람이 된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부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결혼식 없이도 행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비록 의식이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면 그만큼 당당하고 대외적으로 좀 더 떳떳합니다. 물세례가 바로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무엇입니까? 물세례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면 비로소 주어지는 특별한 영적 체험이 성령세례입니까?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경에서 사도행전에 두 번 나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성령세례란 말을 주님이 처음 사용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 언급입니다. 다음은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이것은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고넬료 가정에 있었던 성령 체험을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 체험을 보니 예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세례가 생각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넬료 가정의 성령 체험을 잘 살펴보면 성령세례가 과연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대 백부장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는 아직 유대교도였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사가 계시하여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듣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4절입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그러니까 이때는 고넬료가 구원을 받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를 청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6절입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은 시점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역사한 성령이 처음 우리(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이 임했다고 합니다. 17절도 보십시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도들이 예수를 믿을 때 주신 선물을 하나님이 고넬료 가정에도 주시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령세례를 언제 주십니까? 우리는 흔히 물세례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받는 것이고, 성령세례는 요건이 충족되어야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도들도 고넬료 가정도 처음 복음을 들을 때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물세례 후 기도 많이 하고 헌신을 쌓아야 주어지는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먼저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물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물세례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때 받는 세례인데, 우리가 성령세례 받지 않고서 낯선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6장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의 힘과 노력과 결단으로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왜 절대 다수는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갑니까? 또한 우리는 왜 꿋꿋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단 하나의 차이는 성령 역사의 유무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수순을 따지자면 선 성령세례 후 물세례입니다. 선 물세례 후 성령세례는 오해입니다. 성령세례 못 받은 사람은 절대 물세례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먼저 역사하셔야 우리의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물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넬료 가족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0장 44절 이하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고넬료 가족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그다음에 물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성령세례와 물세례의 관계입니다. 성령세례가 물세례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 치고 여러 사정으로 물세례를 못 받은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불신자나 이교도로 살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후에 물세례를 통해 그들은 교회의 공인을 받습니다. 성령강림의 순간부터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성령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기에 보혜사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천국까지 견인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새 사람으로 신자로 살도록 이끄시고, 필요하면 은혜를 베푸시고,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단히 성령과 교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탁하면, 성령이 아무리 역사하셔도 우리는 둔감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달라거나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은 옳습니다. 성령강림과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1년이 지났다면, 우리는 1년 전에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나 성령강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은 물량적인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응답하고 교감하느냐의 지수, 성령에 대한 우리의 복종지수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 지수가 왜 중요할까요? 이 지수가 높지 않으면 성령 소멸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 지수가 높아야 합니다. 성령이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단히 우리에게 계시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응답하지 않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훼방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지 않으면, 성령이 근심하시다가 당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소멸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불쌍해집니다. 마가복음 3장 29절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부디 성령 충만 지수를 높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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