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순교자들을 기리며

영동고속도로 양지톨게이트에서 빠져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약 4Km정도를 더 가면 순교자 기념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옵니다. 거기서 좁은길을 따라 5백m 가량 더 들어가면 큰 바위에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고 새긴 교부 터툴리안의 금언이 순례객들을 맞습니다. 91년 건축가협회로부터 <대한민국 건축가 협회상>을 받기도 한 순교자 기념관 건물은 아담하면서도 참 정갈합니다.

지난 89년 11월에 세운 그 기독교 순교자기념관에는 현재 2백2명의 순교자들의 유물들과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이며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백홍준 장로님을 비롯해서 천황숭배를 거부하고 반대하다 7년간의 옥고 끝에 1944년 49세를 일기로 순교한 주기철목사님, 6·25당시 교회당을 비우라는 공산당에 맞서다 총살당한 박영근 목사님등….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전파된 이래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증거하다 숨진 개신교 순교자의 수는 약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초기에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고, 일제 때는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라고 박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 6·25때는 반공산집단 이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짓밟혀야 했던 성도들, 특히 일제치하 순교자들은 대부분이 순국지사이기도 했습니다. 선영과 유리탁자 속에 보관된 그들의 손때 묻은 유품들을 보노라면 지금도 당시의 고문받던 순교자들의 단발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간 한국교회의 순교자들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나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고 무심한게 사실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순교자 손양원(1902-1950)목사님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 분은 여순반란 사건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은<사랑의 원자탄>이었습니다. 또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수감됐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된 애국지사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경남 함안 출신으로 전남 여수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며 사역한 목회자였으며, 6·25때는 <제발 피신하라!>는 주위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애양원 교회를 지키다 북한군에게 총살당한 순교자였습니다.

그는 실로 이념과 지역, 신분과 기득권을 초월했던 위대한 복음의 사도요 사랑의 전도사였습니다.
그런 손목사님의 함안군 칠원면 생가가 지금껏 개를 사육하는 폐가로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고 죄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손목사님의 부친이신 손종일 장로님도 3·1운동의 영남지역 지도자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습니다. 따라서 국가적으로는 2대에 걸쳐 국가 보훈처에 등록된 애국자의 집이요 교회적으로는 세계 어느나라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위대한 순교자의 집이 보신탕용 개 사육장으로 버려져 온 현실이 너무 가슴아픕니다.

다행히도 바로 어제 손목사님 생가 복원기공예배가 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감사하기 이를데 없으며 많이 늦었으나마 이를 계기로 순교자들의 신앙과 희생도 재평가 되고 새롭게 복원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