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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210411m]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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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0210411m</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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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요 21:12-17</span></p>
<!-- paragraph:p0003 -->
<p class="p1"><span>네가 나를 사랑하느냐?</span></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span>(요 21:12-17, 개정)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span></p>
<!-- paragraph:p0006 -->
<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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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8 -->
<p class="p1"><span>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아시지요? 유비와 의형제를 맺고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무사입니다. 충성심, 의리, 용맹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우를 좋아합니다. 한번은 관우가 적의 독화살을 맞고 뼈가 썩어가는 치명적 상처를 입습니다. 당대 최고 명의라는 화타를 불러 치료를 부탁하자, 미안하지만 장군의 몸을 쇠사슬로 묶자고 합니다. 끌로 뼈를 쪼아내야 하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관우는 자기 걱정하지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라고 합니다. 관우가 아들을 불러 바둑을 두는데, 화타가 치료하는 동안 관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게 동양이 말하는 영웅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09 -->
<p class="p2"><br></p>
<!-- paragraph:p0010 -->
<p class="p1"><span>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숱한 영웅과 족장들은 물론이고 신약의 사도들도 절대 전설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그들은 동양의 영웅과는 다릅니다. 성경에는 사실상 성자도 없습니다. 모두 허물과 한계와 인간적 약점을 그대로 지닌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별다를 바 없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조차도 특별한 구석이 없습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자나 영웅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멉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1 -->
<p class="p2"><br></p>
<!-- paragraph:p0012 -->
<p class="p1"><span>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천사를 통해 예루살렘 말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지금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다 갈릴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기에 주님을 뵙기 위해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뵙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는 상관없이 그들 나름 좌절하고 실망해서 낙향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직업인 어부로 복귀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야겠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다 따라나섰습니다. 당시 그들은 여인들이 전해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주님의 약속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 그 여인들이 그 말을 전했을 때도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뵙기 위해서가 아니라 3년간 따라다녔던 스승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고향으로 돌아와 고기 잡는 일에 나선 것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3 -->
<p class="p2"><br></p>
<!-- paragraph:p0014 -->
<p class="p1"><span>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그대로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4절 이하를 보십시오.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사실 이 대목은 3년 전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주님을 만날 때의 그림과 똑같습니다. 그때도 베드로를 위시한 갈릴리의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해 허탈해 하고 있었고, 주님이 다가오셔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갑자기 심각해지더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5 -->
<p class="p2"><br></p>
<!-- paragraph:p0016 -->
<p class="p1"><span>그런데 주님이 3년 전 첫 소명 때와 똑같은 설정으로 옛 사람으로 돌아간 제자들의 초심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2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조반 후에 주님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이나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옛 이름이 시몬입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 숯불 가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주님이 최후만찬장에서 오늘밤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하자, 베드로는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사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향했고, 옛 직업인 어부로 복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숯불을 피우시고 더도 덜도 말고 딱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베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유하신 겁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7 -->
<p class="p2"><br></p>
<!-- paragraph:p0018 -->
<p class="p1"><span>본문 15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 물음은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라는 뜻보다는 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주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십니다. 그게 바로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늘 그것을 묻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의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네가 네 자식보다, 네 부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너무 가혹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답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19 -->
<p class="p2"><br></p>
<!-- paragraph:p0020 -->
<p class="p1"><span>뿐만 아니라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각주가 붙어 있지요. ‘이것들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이 사람들보다 또는 이것들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라고 하면 동료를 의미하겠지만, 이것들보다 라고 해석하면 주님의 지시로 그물 가득하게 잡힌 고기를 뜻할 것입니다. 주님은 늘 이 두 가지를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언제나 이 두 가지를 물으시며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십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1 -->
<p class="p2"><br></p>
<!-- paragraph:p0022 -->
<p class="p1"><span>당시 베드로는 이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어휘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랑이라는 말과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랑이라고 한 어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똑같은 사랑이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두 사랑이 엄연히 다른 사랑입니다. 주님은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가페는 절대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답할 때 쓴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입니다. 필레오는 절대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인 사랑, 우정 같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만 대답했습니다. 이전 같았으면 베드로도 당연히 아가페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와 모순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는 아가페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3 -->
<p class="p2"><br></p>
<!-- paragraph:p0024 -->
<p class="p1"><span>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도 필레오로 물으십니다(17절). 왜 그랬을까요? 왜 주님이 아가페를 철회하시고 우정, 의리, 신의 같은 필레오로 그 급수를 낮추셨을까요? 주님은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셨습니다. 아가페 수준이 못 되는데 자꾸만 아가페를 강요하면 베드로가 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힐링은 고사하고 상처가 덧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한 발 물러서자 베드로의 대답에도 힘이 실립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차마 아가페로는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베드로처럼 필레오라도 응답해야 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5 -->
<p class="p2"><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span>이렇게 베드로의 사랑, 베드로의 필레오를 확인하신 주님은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소명까지도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도 회복시켜주시고, 베드로의 사명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사 상처받은 우리의 심령을 치유하사 첫 사랑을 회복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첫 사명과 열정도 회복시켜주십니다. 주님은 한마디로 초심을 되찾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새 출발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셔서 오늘날 우리를 찾아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베드로처럼 정직하게 대답합시다.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양을 치라’는 주님의 당부에도 우리는 결단합시다. 우리 모두가 영혼의 상처와 마음의 깊은 아픔을 다 치유받고 회복해서 건강하게 새 출발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 paragraph:p0027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28 -->
<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 paragraph:p0029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HChKUQRFhII"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