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언제까지 칼로 사람을... (삼하 2:24-32)

언제까지 칼로 사람을...

삼하 2:24-32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26절).

이스보셋의 군사령관 아브넬이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을 향해 <이렇게 계속해서 칼로 서로를 죽여야 하느냐, 피 흘리는 싸움을 이제 그만 두자>며 휴전을 제의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동족간의 싸움을 걸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던 그가(14절)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족애를 호소하며 휴전을 촉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휴전이 성립된 것은 크게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주님도 <칼>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요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그리고 그 칼로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마 10:35)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날선 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의 타락한 양심을 찌르는 번뜩이는 칼입니다. 그것이 허위와 위선의 집단에 비집고 들어오면 그 안에는 갈라짐과 해체의 자기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에게 끝까지 저항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양심에서, 삶과 믿음에서 주님이 품으라고 하신 그 칼의 번뜩임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살기가 아니라 생기고, 남을 해치는 흉기가 아니라 남의 생명을 구하는 진정한 메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브넬과 요압간의 권력 투쟁을 보십시오. 서로가 수구세력과의 대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 것이 되기만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속셈만큼은 누구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늘 수많은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을 그 안에 숨기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믿음이란 그런 악한 길에서 우리의 발길을 돌려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스한 가슴을 가지는 것이고, 그 안에 칼마저도 녹이는 꿈의 열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적용>

-아브넬과 요압 군대의 전사자들은 각각 몇 명이었습니까(30-31절)?

-요압 군대의 전사자 <아사헬>(32절)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내가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신 말씀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적어 보십시오.


<기도>

주님, 오늘 본문의 아브넬과 요압 군대의 칼은 서로를 해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칼일 뿐이지만 주님이 주신다고 하신 칼은 저희의 타락한 양심을 찌르는 칼입니다. 교활하고 오만한 저희의 혀를 단숨에 내려치고, 사랑이 식은 차가운 가슴을 도려내는 심판의 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칼에 찔림 없이는 결코 옛 껍질을 벗을 수 없사오니 저희들 다시 한 번 번뜩이는 복음의 칼 앞에서 눈을 떠 새롭게 살 길을 찾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