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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유명한 희곡 <하나님에 대한 심판>(The Trial of God)은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요 우리에게는 <밤>(Night)이라는 자전적 소설에 나오는 도발적 질문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로 잘 알려진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작품입니다. 


위젤은 유소년기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숨 막히는 죽음의 현장을 직접 경험했고, 이 작품 역시도 그가 수용소에서 목격한 세 사람의 유대교 랍비가 벌인 하나님에 대한 재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많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의 믿음을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심판은 언제나 인간 자신에 대한 심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이를테면 위젤의 이 작품이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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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아브라함의 시험도 그렇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 자체가 전혀 하나님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아무런 저항이나 이의제기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모리아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보통은 절규하고 몇 날 며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고 몸부림해야 상식에 닿지 않습니까? 


조카 롯을 위해서는 그토록 읍소하던 아브라함이 정작 자기 자식의 생사를 위해서는 어째서 그토록 냉정하더란 말입니까? 삼일 간의 여정이면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건만 아버지와 아들은 가는 내내 아무런 대화가 없습니다. 


드디어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두 사환과 나귀는 산 아래 두고 이삭만 데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도 참 충격적입니다. 태워 바칠 아들 등에 나무를 지우고 아버지는 불과 칼을 들었습니다. 낌새가 이상했는지 드디어 아들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가슴을 짓누르던 침묵을 깨뜨리며 아브라함의 심장을 찌르는 칼날이자 하나님을 인간의 법정에 세우고, 그 심판대에 아브라함의 신앙도 함께 올리는 준엄한 선언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차라리 아들을 택하는 편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하나님도 결국은 이해하실 거라며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여지가 아직은 조금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여호와 이레)

 

<웃음>(이삭)이란 뜻의 아들을 지키는 것과 그 아들의 목을 따야 하는 언어도단의 현실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너무 가혹하다거나 말도 안 된다며 되려 하나님의 유죄를 선언하고 이삭을 택함으로써 결국은 이삭도 하나님도 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돌아선다 해도 나는 하나님의 진실과 무죄를 믿으며 오직 하나님 편에 서겠다는 다짐을 널리 천명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때로 벅찬 바람이 불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이 닥치기도 합니다.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현실은 오직 체념만을 강요할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동요하거나 분노하며 쉽게 절망의 화신이 됩니다. 


잿빛 새해, 올해는 역경에 직면할 때마다 이 아브라함을 떠올립시다. 

그는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기 외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끝끝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도 이삭도 다시 얻은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능성도 희망도 안 보였지만 그는 그렇게 홀로 <여호와 이레>의 믿음에 자신의 목을 내댔습니다. 


절망하지 맙시다. 슬퍼하지 맙시다. 희망을 꺾지 맙시다. 

세상 사람들의 온갖 단죄와 비웃음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준비를 태산같이 믿읍시다. 

아브라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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