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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m] 성탄의 계시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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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오늘 새벽에도 어둡고 아픔 많은 이 땅에 새롭게 성탄하신 주님, 진심으로 저희 중심에 영접하오며 감사와 영광을 바칩니다.


성경은 주님이 오시면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해 주신다고 했사오니  오늘 저희에게도 그런 성탄의 은혜를 베푸사  모두가 기뻐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성탄하신 주님,  저희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아니라 이렇게 각 가정에서 주님을 경배합니다. 저희의  이 조촐한 성탄축하예배가 첫 성탄 때 목자들이 드린 그 정성어린 축하처럼 주님의 큰 기쁨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  또 어려운 이웃들,  독거노인들,  시설에서 지내는 어린아이들, 교도소에서 수감생활 중인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허락해 주시고,  지구촌 온  나라와 민족들 위에도 성탄의 참 평화와 안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 새벽 새롭게 성탄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1225m 성탄절 가정예배


눅 2:8-14

성탄의 계시


2020년 전 첫 성탄은 외양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외양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가장 춥고, 냄새나는 가장 낮은 자리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처소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이 바로 그 외양간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왜요?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께 방 한 칸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무심하고, 각박하고, 비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춥고 남루했던 외양간도 주님이 성탄 하시자 어떻게 됐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따뜻한 처소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두루 비치고, 천군천사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또 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달려와 축하드리며 경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탄 현장을 목자들은 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났을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8절 이하입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밤에 저 들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러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곧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증거는 바로 <강보에 싸인 아기>라는 것과 <구유에 뉘어 있다>는 것이니 빨리 가서 그 두 가지 표적을 확인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강보에 싸인 <아기>로 오셨고, 또 외양간의 <구유>를 요람삼아 성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요 메시아, 인류의 구원자라는 분이 어째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인 갓난아기로,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인 외양간으로, 구유로 오셨을까요? 그리고 그게 또 어째서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의 표적이 되고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1. 먼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생각해 봅시다.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어린아이나 여성들은 아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숫자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남자는 최소한 12세가 돼야 비로소 성인식을 치르고 한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해도 어린 아기로 나타나서는 절대 그 신분과 정체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권위주의적 사회였습니다. 


사실 주님은 어차피 마리아와 요셉의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해 오신 분이 아니고 성령으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오신 분 아니십니까?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도 그렇지요. 


여러분, 아담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몇 살이었습니까? 갓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한 살, 우리 나이로 두 살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처음부터 이미 청년으로 태어났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510년에 그린 <천지창조>라는 벽화 가운데서 <아담의 창조>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을 막 창조하시고 나서 서로 손가락을 마주 대고 교감하는 장면인데, 거기 보면 아담이 한 살짜리 갓난아기가 아니고 근육질의 건장한 청년입니다. 하나님이 금방 창조하셔서 아직 따끈따끈한데,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벌써 20대 초중반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에덴동산을 관리하고 또 하와를 아내로 맞기도 했으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한 살 짜리가 아니라 아예 20대 청년으로, 성인으로 창조하신 겁니다. 하와도 마찬가집니다. 태어나자마자 아담과 혼인한 걸 보면 처음부터 20대 여성으로 창조된 겁니다. 


물론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안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금방 태어났다고 해도 되래 우리더러 무식하다며 아담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과학적 진리입니다. 아담의 나이테가 분명 25개니까요! 


그럼에도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뭡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에 하나님이 25살짜리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성서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걸 믿습니다. 우리는 과학자들의 과학적 지식과 결론도 존중하지만, 아담의 나이 25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출생신고서에 잉크도 채 안 말랐다고 말씀하는 성령의 가르침이 더 참된 사실이요 진실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상식과 자연의 질서를 뛰어넘어 처음부터 갓난아기가 아니라 아담처럼 30세짜리 메시아로 짠하고 나타나서 신비주의와 카리스마에 휩싸인 모습으로 공생애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왜 굳이 가장 나약한 모습의 갓난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대체 여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걸까요? 

우선은 겸손한 사람만이,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게 비우는 자만이 주님을 뵙고, 또 영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겸손의 화신이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분>이셨고, 또 사람 중에서도 가장 낮은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 성탄하신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실제 보십시오. 갓난아기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무시하고 적대했던 세력들은 다 그 사회 최고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헤롯당,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다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귄위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용납하지 못하고 도리어 배척했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했던 목자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비록 갓난아기지만 그가 곧 구주요, 메시아요,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을 비웃고 외면하지 결코 영접하지 않습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아기>로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선구자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아담처럼 30세 청년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면, 과연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겪고 당하는 삶의 모든 애환을 그분이 생생하게 다 공감하며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주님은 가난이 무엇이고, 아픔이 무엇이고, 또 억울함이 어떤 것이고, 눈물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어째서요? 그 모든 삶의 고뇌를 선구적으로 친히 다 겪어보시고 체험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구주가 되실 자격이 있으시고, 또 우리가 기도하고 탄원하면 우리의 그 절절한 심정을 가장 깊이 공감하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 다음 두 번째 표적은 뭐라고 했습니까? 

<구유>라고 했지요. 그가 <구유>에 누이셨다는 사실이 또한 그분의 구주되심의 또 하나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또 무슨 얘깁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요, 가장 비천한 처소인 외양간의 구유로 오시지 않았던들 절대 다수가 가난한 사람인 이 세상의 모든 서민들이 어떻게 감히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외양간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누구든 원하면 아무런 장애 없이, 그 누구의 통제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주님이 외양간이 아니라 궁궐이나 어느 귀족의 대저택에서 탄생하셨다면, 과연 목자 같이 비천한 사람들이 경배할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겁니다. 


따라서 높고 잘나서, 혹은 가진 게 많고 교만해서 주님을 못 뵐 사람은 있어도 너무 낮고 비천해서, 너무 가난하고 미약해서 주님을 못 뵐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중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외양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양간에서 짐승의 여물통인 구유를 요람 삼아 탄생하셨습니다. 


가끔 <돈이 없어 예수 못 믿겠다!>는 분들을 봅니다.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현실 교회에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겁니다. 원래는 돈 없는 자, 가난한 자도 아무런 부담 없이, 아무런 문턱 없이 믿고, 또 경배할 수 있는 분이 바로 구유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도, 힘없는 자도 다 믿고 경배하라고 굳이 가장 낮은 자리로, 가장 남루한 자리로, 가장 춥고 배고픈 자리인 외양간의 구유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너무 크고 화려하고 고급화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감, 위화감을 느껴 범접하기가 어렵고 거북할 지경이라면 그건 정말 잘못된 교회입니다. 


주님은 외양간에 계십니다. 주님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포근한 요람이 아니라, 춥고 거칠고 초라한 구유에서 성탄하셨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졌다 해도 교회는 항상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유>로 오신 사건에는 또 하나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음 주님을 뵙고 뭐라고 했습니까? 

요 1:29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맞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미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희생의 제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게 주님의 존재의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 태어날 장소가 어디겠습니까? 

양이 무슨 안방에서 태어날 일이 있습니까? 양이 무슨 궁궐이나 대저택에서 태어날 일이 있습니까? 당연히 외양간에서 태어나야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절대 실수로, 본의 아니게 외양간으로 오신 게 아니고 사실은 제대로 오신 겁니다. 어린 양, 희생양의 분수와 신분에 걸맞게 오신 겁니다. 양이셨기 때문에 외양간으로 오신 겁니다. 


이처럼 주님의 외양간 탄생과 구유에 누이심은 결코 감상적인 사건이나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고, 그렇다고 불행한 사건도 아닌 보다 깊은 구속사적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외양간 성탄은 이미 주님의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을 암시하는 계시적 사건이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구유에 누이신 성탄이 이미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을 계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에서 이미 주님의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그럴 때만 이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것이 됩니다.


부디 주님 성탄의 따뜻한 평화와 어린 양의 무한하신 대속의 은총이 여러분 가정과 지구촌 온누리에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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