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아, 님이여

민족 시인이자 승려 시인인 만해 한용운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오세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됐어요. 어서 오세요,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 없이 <님>이 오실 수는 없습니다. 

나의 기다림과 님의 오심은 별개가 아니라 동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은 것은 님이 아니요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 웃음을 주고, 떠날 때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 웃음보다 떠날 때 눈물이 좋고, 떠날 때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 있습니까?>


마음에 사무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기다림의 민족입니다. 숱한 야화가 다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망부석> 같은 설화는 너무도 한국적입니다. 아기를 업은 어미 같이 생긴 바위를 보고 저게 바로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돌이 되어버린 어느 여인이라고 한 것은 기다림의 한을 품고 사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바위에 투영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가까이는 매년 새롭게 성탄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기다림의 신앙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당시의 예배 형식을 보면 사회자가 큰 소리로 <내가 속히 오리라!>고 외치면 회중은 일제히 <마라나타!>하고 응답하며 예배를 마쳤는데, <마라나타>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아람어입니다.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마라나타>(계 22:20)로 끝납니다.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만큼 절박했습니다. 위기에 몰렸고, 억울하게 죽어갔고, 악한 왕들의 능욕을 피해 살았던 참혹한 박해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오심이 더욱 절실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마라나타>란 곧 예배의 결론이자 신구약 성경의 결론이고, 또 기독교의 결론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마라나타>의 염원과 소망이 없는 사람은 좀 곤란합니다. 

아니, 기다려지지도 않은 이가 어떻게 <님>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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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기다림의 계절인 <대강절>(Advent)을 맞았습니다. 성탄절 전 4주간을 뜻하는 <대강절>은 <오다>는 의미의 라틴어 <아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한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푸른 나뭇가지를 둥글게 엮어 만든 화환에 5개의 양초(Advent Candles)를 꽂고 매주 하나씩 불을 밝히며 주님 오심을 고대하고 준비하는 절기, 세밑은 늘 아쉽고 허전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래도 이 기다림의 절기가 있어 따뜻하고 행복합니다. 

더구나 올해는 지구촌에 불어 닥친 환난의 바람으로 모두가 큰 충격과 안타까움에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코로나19>를 뚫고 반드시 새롭게 성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울게 하신 그분이 다시금 나를 웃게 하실 것입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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