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724m: 주님의 현실주의(마 10:16-28)

2011년 7월 24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10:16-28
제목: 주님의 현실주의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여러분, 주님은 이상주의자이십니까? 현실주의자이십니까? 주님은 현실주의자이기보다는 이상주의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냐면 공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시든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주님의 유명한 설교문입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왼 뺨을 치면 오른 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갖고자 하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5리를 가자면 10리를 동행하라,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들이 현실성이 있습니까? 너무도 이상적입니다. 주님은 이상주의자이십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 상반절을 보면 대뜸 사람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조심하라,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일단 의심해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처음으로 세상으로 내보내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주님쯤 되면 사람을 믿어라, 무조건 신뢰하라, 끝까지 사람들을 믿어주라고 해야 주님답습니다.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말인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야말로 주님의 이 현실감각에 놀랍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맹목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무섭도록 현실을 꿰뚫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양을 이리에게로 내보내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을 이렇게 보셨습니다. 터무니없는 낙관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이상주의자셨습니다. 오직 공생애 동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현실주의자셨습니다. 냉엄한 현실주의자셨습니다. 세상을 정확히 보고 계셨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세상에 나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당부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다.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의 천적입니다. 사람들을 경계하십시오. 사람들을 일단 의심해 보십시오. 그래야 이리들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이리들도 양의 탈을 쓰고 삽니다. 발톱을 감추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내가 경계심을 풀면 가차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라는 겁니다. 세상을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조심하고, 경계하고, 의심하되 두려워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이 말씀도 얼핏 들으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26, 28, 31절). 사람을 경계하라고 하시고 나서 두려워하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양은 이빨이나 발톱이 날카로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방향감각도 어둡습니다. 그런 양들을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내보내시면서 그들을 조심하되 두려워하지는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섭습니다만,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해쳐도 육밖에는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을 지옥에 던질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면 이 세상이 주는 상대적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절대적인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놓치고 산다는 뜻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렇게 살면 세상이 주는 온갖 크고 작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리를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십시오. 그러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이 주는 두려움이 해소되고 극복됩니다. 절대적인 두려움 앞에서 상대적인 두려움이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해쳐봤자 육신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혼까지도 죽이십니다.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질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상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절대적인 두려움의 대상으로 믿지 못하는 증거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경계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보다 더 두려우신 분, 크신 분의 면전 앞에서 우리가 살기에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요구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디모데후서 1장 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능력은 그리스어로 듀나미스입니다. 듀나미스는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듀나미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다이너마이트를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떨며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을 경계하고 조심하되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합니다. 세상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이 나를 지키시며, 그분이 나에게 성령의 다이너마이트를 한 짐 지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비굴해서 지레 겁먹고 백기투항해서 그렇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고 용감하게 살아야 할 이유만 있습니다. 세상을 주님처럼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경계하십시오. 절대 과대나 과소 평가를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보다 훨씬 두려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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