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m] 솔리 데오 글로리아 (시 115:1,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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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m
시 115:1, 롬 1:17
솔리 데오 글로리아
(시 115:1, 개정)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문의 시편 말씀은 칼빈의 요절입니다. 칼빈이 이 구절을 늘 묵상하고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입니다. 이것의 그의 종교개혁의 원리입니다. 칼빈의 자기 무덤의 비석도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칼빈의 무덤은 초라합니다. 작은 돌판에 J. C. 라고만 새겨져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당부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약 본문은 유명한 종교개혁의 원조인 루터의 요절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고, 평생 그의 개혁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루터는 이 본문을 근거로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 의식을 강조했고, 면죄부를 팔며 그런 것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믿음을 내세우며,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교인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개혁을 통해 좀 더 성서적인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자며 500년 전 새롭게 출범한 신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저항자, 반항자, 항의자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개신교회입니다.
당시 종교개혁은 독일의 루터만이 아니라 스위스의 쯔빙글리,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프랑스의 존 칼빈도 함께 개혁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면 장로교는 당시 유럽의 여러 개혁 노선 가운데 칼빈에 속합니다. 칼빈이 장로교의 원조입니다. 유럽에서는 칼빈주의를 장로교라 하지 않고, 개혁교회(reformed church, reformierte Kirche)라 부릅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호주, 우리나라에서는 장로교(presbyterian church)라 부르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칼빈주의가 루터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이어서 칼빈파를 개혁교회라 부릅니다. 루터파는 루터교회라 부릅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우리나라는 칼빈파의 신학이나 교회 특색보다는 장로 중심의 교회라 해서 장로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정치에 주목한 것입니다. 감리교는 감독제입니다만, 칼빈파는 대의제, 곧 장로를 선출해 교회를 치리하게 합니다. 어쨌든 유럽의 개혁교회나 장로교는 다 칼빈파에 속합니다.
장로교의 원조인 존 칼빈은 유럽 전체가 로마 가톨릭에 지배를 받던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쪽 90km 떨어진 로용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자수성가한 지역 유지였고, 칼빈은 14살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대학 신학부에 진학합니다. 그는 거기서 라틴어, 헬라어, 고대 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신학이 적성에 맞았는지 늘 최고의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미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지 5년 만에 아버지가 뜻을 바꾸는 바람에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꿉니다. 칼빈은 엄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독일의 루터와는 반대 길을 걸었습니다. 루터는 아이슬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어느 날 길을 같이 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고 숯덩이로 변하는 체험을 하고 거기서 서원을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칼빈은 법학을 3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지체 없이 신학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고전어에 탁월했습니다. 신학은 고전어를 잘 해야 합니다. 대다수 신학 서적이 라틴어로 되어 있었고, 구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니 그 언어가 필요하고, 신약은 헬라어니까 또 그 언어가 필요합니다. 유럽에서는 고전어 때문에 신학만큼은 부전공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때가 1530년대 초반이었고, 칼빈은 30대 초반에 들어섰습니다. 독일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이 융성하던 때였지만, 아직 칼빈은 종교개혁가의 반열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니클라스 캅 교수가 파리대학 총장으로 취임했는데, 그 취임식 연설문을 칼빈이 마태복음 5장 3절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노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이 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파리를 떠나 유랑생활 하며 개혁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슈트라스부르에서 활당하다가 스위스 바젤, 이태리로 방랑하다 고향 로용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네바를 경유하면데, 거기서 파렐이라는 사람을 만난 인연으로 거기 머물며 활동했습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목회도 하고 주석도 씁니다. 또한 그는 필생의 역작 <기독교 강요>를 쓰고, 제네바 대학도 설립합니다. 학생들은 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국으로 돌아가 개혁의 지지 세력이 됩니다.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이때부터 그 시에서는 신정정치가 시작됩니다. 칼빈은 양심적인 금융사업을 장려해서 은행을 설립합니다. 또한 근면한 수공업을 정착시키기 위해 시계와 세공 산업을 집중 육성했습니다. 지금도 스위스는 은행과 시계 산업이 유명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의 뿌리로 칼빈주의를 든 것이 바로 이 이유입니다.
칼빈은 32세에 결혼했으나 10년 만에 사별하고, 아이도 낳았으나 태어난 지 2주 만에 죽습니다. 칼빈의 전기를 쓴 작가는 칼빈을 가리켜 <우울한 천재>라고 불렀습니다. 칼빈은 늘 원인모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루터는 63세까지 살았는데, 칼빈은 55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1564년 5월 27일 토요일에 칼빈이 별세하자, 제네바 시 전체가 충격과 우울함에 빠집니다.
학자들은 칼빈을 어거스틴 이후 가장 유명한 저술가, 신학자, 개혁가라고 평가합니다. 루터가 역동적인 운동권이었다면, 칼빈은 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이론가, 행정가, 체계적 교리주의자요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루터가 온 몸을 던져 시작한 종교개혁 1세대라면, 칼빈은 2세대로 기독교 사상을 신학적으로 조직화, 체계화한 위대한 학자였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의 두 원류요 거대한 산맥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두 사람의 교리적 입장 가운데서 칼빈 쪽에 속합니다. 루터와 칼빈은 늘 같은 입장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구원관이 달랐습니다. 가톨릭은 자선과 선행 등 행위로 공덕을 축적해야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 시대의 교황이던 레오 10세가 지금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지으면서 자금이 달리자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공덕이 못 미쳐 천국까지 못 가고 연옥에 대기하는 부모나 조상의 영혼이 즉각 천국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여기서 결정적으로 돌아섭니다. 그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써 붙인 대자보의 대부분의 내용이 면죄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구원은 인간의 공덕도 면죄부로서도 아니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믿음 이전의 예정과 선택에까지 소급합니다. 칼빈은 루터가 말하는 믿음 조차도 이미 창세 전에 이뤄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결과라고 합니다. 칼빈은 구원에 있어서 루터가 주장하는 믿음 이전의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결과를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관도 다릅니다. 가톨릭의 문제는 성서를 사제가 독점한 것입니다. 성경이 사제의 권위와 교권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무기요 방편이었습니다. 중세 때는 라틴어 성경만 있었는데, 사제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 제작도 엄격히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에 착수하면서 성경 번역에 가장 먼저 손을 댔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독일어로 먼저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1000년 동안 사제들의 전유물인 성경을 일반 신자에게 돌려줍니다. 비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 기술이 루터의 성경 인쇄에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500년 전에 번역한 루터 번역을 독일 사람들은 가장 애용합니다. 가톨릭은 정경 66권 외에도 외경과 교황의 교서까지 성경과 대등하게 봅니다만, 루터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칼빈은 루터의 성경관과 다릅니다. 루터는 구약 열왕기서의 신빙성과 에스더서를 의심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신약의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이라는 원칙에 철저했습니다.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로마서 주석을 낸 이후 죽기 전에 낸 여호수아 주석까지 성경의 거의 전부를 주석했습니다. 요한 3서와 계시록 주석이 빠졌지만, 그가 좀 더 살았다면 다 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주석서들을 불후의 걸작으로 평가합니다.
개혁의 원칙에서도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루터는 끝까지 두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 왕국과 세속 왕국을 구분하여,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왕국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고, 교회는 종교에만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중세 1000년의 암흑기라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권뿐 아니라 세속의 권력도 장악했기에 빚어진 필연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두 왕국설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달랐습니다. 그는 루터와 반대로 그리스도 통치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세계가 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임을 내세웠습니다. 온 세계와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정의롭고 공의로워진다고 칼빈은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일원론입니다. 세계와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은 아직도 하나님의 공의가 관철되지 않은 분야가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관철하는 것이 칼빈의 입장입니다.
같은 시대에 종교개혁에 매진한 루터와 칼빈은 조금 달랐습니다. 우리 교회는 칼빈 쪽에 속합니다. 개혁교회의 뿌리인 종교개혁 사상과 칼빈주의의 정체성이 여러분의 믿음과 삶에 힘이 되고 한국 사회의 개혁에 이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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