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0n: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 2:1-12) 교회학교 교사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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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0일 주일오후예배/교회학교 교사헌신예배
본문: 막 2:1-12
제목: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1]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실어 주님 앞에 나왔는데, 주님이 그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즉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구원해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조금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구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9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의 믿음이기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 이전에 죄사함, 곧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11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며 육신까지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네 사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주님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신 것일까요?
우선 그들은 행함으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머리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합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동정심을 가질 수는 있으나 실제 결단하고 주님 앞에 메고 나오기는 쉽지 않은데, 그들이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주님이 높이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잘 믿는데, 삶으로 믿지 못합니다. 이 네 사람과 중풍병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들이야말로 온 몸으로, 삶으로 믿는 사람이었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기에 합당했습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몸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삶으로 믿는 신앙, 행위로 믿는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항상 괴리와 분열을 겪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욕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교사들은 특히 몸으로 믿는 표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들에게도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교회학교 사역에서 열매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정말 부지런해야 하고 재발라야 합니다. 교사가 나태하거나 게으르면 교회학교는 안 됩니다. 푸른교회 교회학교 교사들의 믿음을 주님이 보시고 어린 생명들을 구원해 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이 우리 푸른교회에서 5절의 말씀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합심하였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위해 네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 원래 한 생명을 구원하는 데는 네 사람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학교 아동부가 비대칭입니까? 아닙니다. 원래 한 명에 네 사람이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합력해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는데, 하물며 한 생명, 한 영혼이겠습니까? 더욱 노력하시고 더욱 사역을 아름답게 이루셔서 주님이 기대하시는 영혼 구원 사역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도 합심기도가 아름답습니다. 주님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신다고 하신 말씀도 합력하여 사역하고 합심하는 곳에 하나님이 더욱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푸른교회 교회학교가 다 교사들의 합심과 합력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사역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회성을 키우는 일은 에베소서 4장 2절 이하에 나옵니다.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것이 바로 동역과 합력의 비결입니다. 더욱 자신을 살피며 겸허하게 자신을 내려놓으며 합력하여서 주님이 교사들의 합력하는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모험하는 믿음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들의 믿음은 비상한 믿음이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왔으나 주님이 계신 곳까지 갈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돌아섭니다. 우리 힘껏 최선을 다했으나 더는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간 겁니다.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의 지붕은 평평합니다. 그리고 그 지붕을 뜯었습니다. 그게 자기 집일 리 없는데 남의 집 지붕을 뜯었습니다. 그 지붕 아래 방안에는 사람들이 잔뜩 차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지붕을 뜯다가 기와라도 떨어져서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하려구요? 그 뜯은 지붕 아래로 중풍병자의 들것을 달아 내립니다. 기어이 주님 앞에 환자를 대령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무모한 모험을 책망하신 게 아니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즉시 중풍병자의 죄사함을 선언하시고, 이 상을 들고 가라며 육신까지도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모험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안전하게만 믿습니다. 항상 주님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모험도 있어야 합니다. 너무 상식만 존중하면 안 됩니다. 얼마나 비상식적입니까? 상식은 이런 겁니다. 어렵게 주님 앞에 중풍병자의 들것을 메고 왔으나 사람들이 꽉 차 있으니 매너 좋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가서 지붕을 뜯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그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만 할 줄 알았지 우리가 이렇게 할 줄 모릅니다. 하여간 우리는 너무 품위 있게 예수를 믿습니다. 앞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위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상상력, 모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난감해 하지 않으시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의 거친 믿음, 모험의 도박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치시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모험을 하십시오. 앞으로 나가는 길이 막혔다고 포기하지 말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달아 내리십시오.
어느날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풍랑과 싸우는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도 바다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자, 주님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정말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한 모험이고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잠시나마 그렇게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그리고서 파도가 무서워 바다에 빠졌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험하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를 주님이 여기서 지적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주님처럼 바다 위를 걸을 엄두를 못 내는 겁니다. 오히려 바다 위를 걷겠다는 사람을 황당하다고 욕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정말 그렇습니다. 그들의 믿음처럼 모험하는 믿음이 놀라운 기적을 만듭니다. 푸른교회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런 모험하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 앞에 데려오는 어린 영혼들을 꼭 구원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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