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m] 원망과 감사 (민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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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7w 추수감사주일
민 11:1-9
(민 11:1-9, 개정)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오늘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 안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까? 과거 이스라엘은 늘 원망하고 불만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그들이 원망하다 멸망했으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하루하루가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이 범한 죄가 원망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 진영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모세가 급히 하나님께 사죄를 빌어 하나님이 그 진노의 불을 거두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직후에 4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다시 고기 타령을 합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이 먹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타올랐던 여호와의 진노의 잔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았는데 다시 원망하기 시작한 겁니다. 모세가 기가 막혀서 이렇게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민수기 11장 11절 이하입니다.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는 못살겠으니 아예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현실에 자족하지 못하고 백성이 불평하는 현상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원망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본문 4절은 그 점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4절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백성들 가운데 다른 인종이 탐욕을 품으면서 불평하고 원망하자 이스라엘도 덩달아 울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합니다. 첫째는 불평과 원망이 반드시 탐욕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절대 현실에 자족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탐욕을 발동하면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충족됩니까? 자신의 탐욕을 제어하지 않는 한 그 사람에게는 결코 감사란 없고 오직 불평과 불만, 원망만 있을 뿐입니다. 자족할 줄 알아야 감사가 가능합니다. 자족하고 겸허하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4절이 밝히는 또 하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 불평의 원점이 어디인지입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다른 인종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만 출애굽한 줄 알았는데 거기에는 다른 인종도 섞여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각 나라에서 잡아온 전쟁 포로들이 함께 노예생활을 했기에 그 노예사회에는 다른 인종이 섞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때 그들도 이스라엘에 묻혀 함께 나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 이하입니다.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유대인 외에도 수많은 잡족이 함께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화근입니다. 그들에게서 탐욕과 원망이 시작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 전염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원망이란 근본적으로 이방인들의 삶의 행태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불만은 택하신 백성 가운데 섞여 사는 인종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습성이지 하나님 자녀의 사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믿는 자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과 한통속이 되어 살면서 그들의 나쁜 영향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들의 나쁜 습성을 학습한 것이고 전염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미혹되어 그들과 똑같이 남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일삼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가 툭하면 세상 사람처럼 남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으며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출애굽의 은혜를 망각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생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감사 품목 제1호가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 애굽, 세상에서 불러내사 가나안을 향해 가는 하나님 백성의 반열에 세워주신 은혜에 대해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영도로 애굽 땅을 탈출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여전히 저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죄의 노예로 온갖 짓을 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내오 더는 마귀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도 보면 그렇습니다. 출애굽의 은총을 망각할 때는 반드시 타락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출애굽에 대한 원초적인 감격을 상실하면 그때부터 신앙에 침체가 오고 매사에 짜증과 원망이 시작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애굽에서 구출하시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출애굽했듯이 우리도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 하나만 잊지 않아도 우리는 평생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사건을 망각하면 그 순간부터 원망의 미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도 그 어떤 복보다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구속해주신 은혜에 가장 먼저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원초적 감사의 근거요 핵심입니다.
우리의 원망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만나의 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감사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기인합니다. 우리는 만나를 당연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 만나를 보십시오. 그들이 만나를 처음 먹었을 때 그 감격이 얼마나 컸습니까?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만나를 꿀맛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감격이 시들해집니다. 처음에는 꿀맛이었는데 이제는 기름 섞인 과자 맛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찮은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하십니다. 그들이 여전히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있고, 생수를 마시며, 행군하는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는데도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참외, 부추, 파, 마늘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기력이 다 했는데도 만나만 준다고 불평합니다. 개역성경은 기력을 정력으로 번역했습니다. 자신들의 정력이 바닥났는데도 하나님이 부추 같은 것은 안 주시고 만나면 준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여러분, 모두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우리는 올해도 주님의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만나로 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헐벗지 않고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남편이 돈 벌어 왔다구요? 잘난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단지 가장의 체면을 생각해 하나님이 여러분의 남편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이란 우리에게 가당치 않습니다. 모든 탐욕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셈을 해보면 올해도 우리는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원망은 앞으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실 은혜인 가나안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흔들릴 때 필히 발생합니다. 우리가 누릴 최상의 복은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은 과거와 현재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고 궁극적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 부분에 대한 기대와 대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출애굽이란 은혜를 입고, 현재는 만나와 메추라기 은혜를 누리지만, 앞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천국 가자는 종교입니다. 천국이야말로 우리에게 보장된 최상의 복이요 은혜입니다. 의외로 천국의 소망에 대해 무덤덤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실종되었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낙이 없습니다. 천국에 소망이 확실할 때 신앙생활하며 당하는 고난이나 시련이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되어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그것을 이깁니다. 가나안에 대한 확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자발적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면, 이쯤에서 신앙생활을 접는 게 이익입니다. 괜히 섞여 사는 다른 인종처럼 날마다 불평하고 원망하며 억지로 끌려가기보다는 지금이라도 가나안행을 포기하면 그만큼 덜 손해를 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 옛날처럼 사는 게 낫습니다. 그럴 뜻이 없다면, 부디 천국에 대한 희망으로 사십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장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소중한 복은 맨나중에 주십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원리입니다. 자연도 열매가 가장 나중에 열립니다. 아직 우리에게 베푸실 가장 좋은 복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가나안, 천국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오직 하나 가나안을 목표로 광야 길을 유랑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다 앞서거니 뒤서거니하여 곧 가나안에 당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여정의 종착점을 천국으로 확정하시고 보장하신 사실에 깊이 감사합시다.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늘 기쁘고 환한 표정으로 삽시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이들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불평하며 살지 맙시다. 그것은 다 섞여사는 다른 인종의 모습이지 절대 하나님 백성의 라이프 스타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기뻐하며 밝은 표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가나안이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삽시다. 그래서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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