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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5월 28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12<br>본문: 고후 7:2-16</p>
<!-- paragraph:p0002 -->
<p>[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p>
<!-- paragraph:p0003 -->
<p>지난 주에 공부했던 6장 14절을 보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마귀가 조화될 수 없고, 하나님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겠느냐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상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p>
<!-- paragraph:p0004 -->
<p>오늘 본문 7장에서는 2절을 보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지난 주의 주제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고, 오늘은 바울을 위시한 목회자들을 영접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했을까요?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마음이 아니라 형식적이거나 피해의식, 경계심 같은 것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참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7장 전체는 ‘마음으로 영접해 달라’는 바울의 요청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무도 해롭게 하지 않았고, 속여서 빼앗은 일도 없는데, 왜 사무적으로만 대하느냐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 피해의식을 갖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와 목회자는 사업관계도 아니고, 취미가 같아서 만나는 동호회도 아니고, 고향이 같아서 만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만난 사이입니다. 성도, 출신도, 지위고하도 다르지만 믿음 때문에 만난 순수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가슴을 열고 대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대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안타까워서 내가 너희에게 속인 적도, 해를 입힌 적도 없다고 합니다. </p>
<!-- paragraph:p0005 -->
<p>그러면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에게 마음을 닫았을까요? 4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합니다. ‘담대한 것도 많다’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허물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지적하고 책망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상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자와 목회자들에게 마음의 빗장을 가로질렀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지적하면 마음을 닫습니다. 그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미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p>
<!-- paragraph:p0006 -->
<p>그런데 바울이 책망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진심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허물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자랑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보다 역동적이고 열심히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환난으로 고난을 당할 때에도 고린도 교회로 인해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내(=바울) 마음을 몰라주고 마음의 문을 닫았느냐는 겁니다. </p>
<!-- paragraph:p0007 -->
<p>목회자들은 때로 성도들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책망도 하고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성도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다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시험에 들고, 마음에 빗장을 지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마음을 열고 목회자를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이런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p>
<!-- paragraph:p0008 -->
<p>그래서 바울이 구체적인 예를 한 가지 듭니다. 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에 있을 때, 육체도 편치 못했고, 교회도 안팎으로 어려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당한 고통은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린도에 있던 동역자 디도가 바울에게 와서 바울이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사면초가로 고통과 환난을 겪고 있었는데, 디도가 온 것도 위로가 되었지만, 디도가 고린도 교회의 은혜로운 상태를 전해준 것이 더욱 기뻤다는 겁니다. 그러니 편지로 책망하고 근심하게 한 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야속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겁니다. </p>
<!-- paragraph:p0009 -->
<p>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바울도 처음에는 자기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상심하니까 그 편지 쓴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바울의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가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p>
<!-- paragraph:p0010 -->
<p>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근심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세상적 근심은 결국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백해무익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근심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인데, 결국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근심이란 말은 상심을 가리킵니다. 내 잘못을 지적받을 때 근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결국 영적 고뇌가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다다르게 합니다. 영적 고민과 신앙적 고뇌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근심이기에 우리를 해치지 않고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영적 고민이 없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신앙적 고민이 있어야 회개하게 됩니다. 결국 이 말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할 때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장은 고민하게 만들지만, 영적인 고뇌를 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죄 때문에 고민한다거나, 기도하지 못해 근심한다거나, 말씀을 마음껏 보지 못해 고민하거나, 주일성수로 고민하거나 하는 등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고뇌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이 없으면 영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영적 근심과 신앙적 고뇌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근심이고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11절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고, 내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분노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사모하게 하고, 열심을 품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허물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할 때, 겸손하게 그 말씀을 용납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과거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의 교회나 동일합니다. 회개나 자기 성찰은 없고 아픔만 안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애정을 갖고 말한 지적이 은혜가 되지 못하고 상처로 남아 불행하게 됩니다. 목회자의 책망과 지적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으로 향하는 근심에 이르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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