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기쁨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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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항상 기뻐하라>(빌 4:4)고 합니다.
그러나 이 권면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기뻐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는데, 현실은 언제나 기뻐할 일보다 오히려 아파할 일, 슬퍼할 일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이 우는 데 나 혼자 기뻐하는 것은 삶을 조롱하는 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기뻐하는 것만이 미덕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바울 자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언제나 기쁨보다는 고난을 더 많이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우선 불치의 병을 안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마치 <몸을 찌르는 가시>(고후 12:7)와도 같은 치명적인 지병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바울의 사도 자격을 시비함으로써 얼마나 모진 아픔을 줬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기쁨의 서신>인 빌립보서를 쓸 당시는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역설적인 기쁨입니다. 기쁜 일이 있어서 만이 아니라 병이 나도, 사람들의 모함으로 아픔을 겪어도, 무고하게 감옥을 가도 기뻐하는 초월적인 기쁨,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합 3:17) 감사하는 전천후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런 기쁨이 실제 가능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기쁨>과 <즐거움>을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갈라디아서 4:19이하에서 말하는 <해산>이란 몹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게 결코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고 기쁨마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고통과 기쁨은 얼마든지 동시적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때로 고통과 아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의 고통이 즐거움은 앗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기쁨은 빼앗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 그럼 극심한 고통 중에도, 손해를 보고 막대한 불이익을 당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역설적인 기쁨, 초월적인 감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사랑의 대상이 온통 나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자식의 존재가 어머니를 가득 채우고 있으면 어머니는 그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참 기쁨은 언제나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할 때입니다. 예술가의 진정한 기쁨은 예술 그 자체에 심취할 때 오는 것이지 그것을 이용해 돈이나 명예 따위를 얻겠다고 하면 즐거움은 몰라도 기쁨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얻는 기쁨이나 감사도 마찬가집니다. <그래도 난 저 사람들보다는 나아!> <그래도 우리는 저 사람들과는 달리 살 집이라도 있으니 감사하지!> 이런 상대적인 감사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는 순간 금새 불평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권하는 감사는 그게 어떤 것이든 내 사정과 형편 그 자체를 감사하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그분 존재 자체가 목적이고 그분 자체가 순수한 사랑의 대상으로 나를 가득 채울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결코 즐겁지는 않습니다. 즐거움으로 말하면 세속적인 삶이 훨씬 더 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분명 값진 기쁨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역설적인 기쁨이고 초월적인 감사입니다. 지금 어떤 처지에 계십니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 한 분 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음을 고백해 보십시오. 이 추수감사절 아침에 바치는 최고의 헌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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