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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m]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요 13:1-17)

20171112m

요 13:1-17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요 13:1-17, 개정)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지금은 주님이 떡과 포도주로 성찬식을 제정하셨던 최후만찬석상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최후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범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주님 사랑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것은 끝까지 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원망과 배신감을 느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붙잡았던 하나님 손을 놓는다 해도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존재만큼이나 영원하고 절대적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사랑합니다. 물론 요즘은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들이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도 있고, 엄마가 자식을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사랑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제아무리 부부사랑, 부모사랑, 자식사랑이라 해도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근친살인, 존속살인도 벌이는 게 인간 사랑이고, 이것은 인간 사랑의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모두 상대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즉 인간의 사랑은 조건반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불가사의합니다. 그렇다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 한 분만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래서 한 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한 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한 자녀입니다. 


보십시오. 이때 이미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주님 팔 생각을 넣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으로 보면 이미 가룟유다는 주님을 은 30에 판 이후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가룟유다는 주머니 속에서 은 30을 만지막 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룟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습니다.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은 30이었습니다. 주님을 노예 한 사람 값 정도로 판 겁니다. 이걸 다 아시고도 주님은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신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을 친히 주님이 실천해 보이신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끝까지 사랑합시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회의하거나 저버리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두 번째 모범은 섬김입니다. 주님이 최후만찬을 드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두고 너희를 위한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하십니다. 4절 이하입니다.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팔레스틴은 건조한 지방이고, 유대인들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녔기에 남의 발을 씻기는 행위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주님 당시만 해도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감당했느냐면 유대 사회 최하층 계급인 종, 노예들이 전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겁니다. 이게 충격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남을 섬기는 종의 도, 노예의 도덕을 친히 실행해 보이며 너희도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13절 이하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우리는 주님이 최후만찬석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마치 종처럼 노예처럼 남의 발을 씻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보십시오. 엊그제까지는 무조건 을이 갑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견고한 우리 사회의 질서요 문화요 관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갑의 시대였다는 겁니다. 이것은 순리였습니다. 그래야 출세도 진급도 하고, 졸업도 하며 학위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패러다임이 바뀌었습니다. 갑이 을을 섬겨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선생이 제자를 섬기고, 장교가 사병을 섬겨야 합니다. 이제는 누구라도 남을 섬겨야 합니다. 얼마 전 공관병에 대한 육군대장과 그 가족의 갑질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군 서열 3위였습니다. 지금 재판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부가 피의자 신분으로 군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일개 사병이 별 4개를 떨어뜨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제는 갑의 시대가 아니라 을의 시대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갑이 을을 섬기는 것, 이것은 사실 성서적입니다. 주님이 2000년 전에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퍼포먼스를 통해 모범을 보이신 겁니다. 우리는 이제야 그쪽으로 눈을 조금 돌리기 시작한 겁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멉니다. 기독교는 갑의 종교가 아니라 을의 종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발을 씻기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갑질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입은 종인데 삶은 제왕입니다. 종놈이 아니라 종님입니다. 이것은 코미디입니다. 종에게는 님이 아니라 놈이 붙는 것입니다. 놈이 되어야 남을 섬기는데 님이어서 남을 섬기지 못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내가 온 것은 남을 섬기러 온 것이며 목숨을 내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섬기는 종, 섬기는 신앙, 섬기는 삶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합시다.


주님이 보이신 또 하나의 모범은 남에 대한 이해입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당시 문화로 볼 때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은 확실히 충격적입니다. 그래도 다른 제자들은 당혹스러웠지만 그걸 용납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완강했습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8절 하반절도 보십시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말에 대해 지금은 이해 못하나 나중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반발을 수긍하시고 이해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드는 반기를 가차  이 짓밟고 싹을 잘라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자기 겉옷을 서로 갖겠다며 십자가 아래서 제비를 뽑고 있는 사람을 향해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해주소서. 저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하셨으나 제자들이 잠에 빠지자, 마음은 원이나 육신이 약하구나 하시며 자라고 하십니다. 실제 제자들이 육신이 약해서 그렇게 잠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이 그들을 이해하신 것은 제자들이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너무 지쳐서 잠 드는구나 하신 겁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이 하시는 세족을 막아서자 네가 몰라서 그러는구나 하신 겁니다. 


주님처럼 삽시다. 주님에게 이해심이 없다면, 관대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반항하고 범죄하고 실수하고, 회개하고 다시 같은 죄를 지어도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자녀의 신분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저 사람도 제 허물을 깨닫고 회개할 날이 오겠지 하면서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포용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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