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나머지 아홉은?

어느 날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 사이를 지나시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멀리 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멀리 서서> 호소했다는 것은 곧 기존 질서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던 당시 그들의 불행한 처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저주스러운 간격>을 뛰어넘어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병이 나았음을 공인받는 절차로 그래야만 그들이 다시금 가정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주님의 그 말씀과 함께 그들이 즉각 깨끗해진 게 아니라 길을 가다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면야 열 명 모두가 당장 주님 앞에 엎드려 심심한 사의를 표했겠지만 가던 중에 치유됐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때문에 나은 걸까? 그동안 해 온 처방의 효험이 이제서야 나타난 건 아닐까? 가던 길이니 일단 제사장부터 만나고 예수님께는 나중에 감사하지 뭐! 나는 처자식 만나는 일이 더 급해!> 조금 전 그토록 절절했던 마음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모두가 제 편리한 대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생각하며 배은망덕할 때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 나환자만은 지체하지 않고 그 가던 길을 되짚어 가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며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신 주님이 그에게 선언하신 말씀이 놀랍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시 말하면 가버린 아홉은 육신의 병만 나았을 뿐, 너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얻었다며 <일어나 가라!>고 하신 겁니다. 이렇듯 주님은 <감사>와 <믿음>을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간 아홉은 단지 <감사>라는 인간의 도리만 생략한 게 아니고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라는 주님의 선언이 자못 충격적이고, 감사를 외면하는 행위는 결국 구원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누가복음의 이 증언이 파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째서 감사를 구원의 전제로 선포하신 걸까요? 어째서 돌아와 감사한 사람의 행위를 곧 믿음으로 간주하신 걸까요? 

감사란 그가 은혜의 원천적 존재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의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이 입은 은혜의 원천을 멸시하는 행위며 그런 감사 부재의 심령 속에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사와 믿음, 그리고 구원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는 한 사회를 떠받치는 기본적인 토양이기도 합니다. 가령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푸대접을 받고, 친일을 한 사람들의 후손들은 막대한 부로 지금도 영화를 누리고 있다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연 누가 구국의 길에 나서려 하겠으며, 또 양심적인 공직자들이나 청렴한 교육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와 희망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며 감사의 표현이 풍족한 사회일수록 더욱 너그러워 웬만한 갈등쯤은 힘들이지 않고도 다 해결할 수 있는 성숙한 저력을 가지게 됩니다. 

제발 작은 일에도 감사에 인색하지 맙시다. 감사의 기도에 보다 풍성합시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삶에 주님의 은혜와 구원이 임합니다. 감사야말로 이 팍팍하고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또 하나의 별의 이름입니다. 치밀한 타산과 이기적인 처세술 때문에 우리가 흔히 잊고 살기 쉬운 <별> 말입니다.